최근 <중국화 하는 일본>을 보면서 '근대'라는 개념을 새롭게 바라봤던 이전의 책들이 떠올랐다. <중국화 하는 일본>에서 말하는 근대의 개념은 봉건제와 특권귀족이 사라지고, 어느 정도 기회의 평등이 이뤄진 시기를 뜻한다. 그리고 과거제가 도입돼 누구나 관료가 될 수 있었던 송나라 시기를 최초의 근대라고 평가한다.
알렉산더 우드사이드가 쓴 <잃어버린 근대성들>의 의견도 그와 비슷한 것 같다.(기사참조) 과거제를 통해 능력에 따라 공직자를 뽑는 일은, 그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어떨 지 몰라도 전 세계사적인 관점에서는 극히 예외적이었다는 것이다. 예컨대 버트런드 러셀은 1922년 <중국인의 문제>에서 중국이 오래된 낡은 제도와 관습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충고했지만, 여전히 당대의 영국은 세습적인 상원이 존재하고 있었다. 따라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조선 혹은 동아시아 역사에 일종의 근대성이 숨어있었다는 얘기다.
미야지마 히로시 교수는 '소농 사회'를 근대의 출발이라고 말한다.(기사참조) 소농 사회란 대토지 귀족 중심의 경제가 아니라 토지를 개별적으로 소유한 소농이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면서 경제의 중심을 이루는 사회다. 물론 그 시기를 명나라부터라고 보는 데서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어쨌든 특권 귀족과 봉건제가 없어진 그 시점을 근대의 출발로 여긴다. 어쩌면 그것은 서구의 '근대'와는 다른 '유교적 근대'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들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근대=서구화'라는 생각을 무너뜨리고 있다. 물론 기존에도 무자비한 서구식 근대화가 가져온 폐해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공감대가 형성돼 있었지만, 근본적으로 근대화(=서구화)는 어쩔 수 없는 시대적 물결이었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오히려 우리는 '근대'의 지진아로서, '근대'라는 말만 들어도 서양에 대해 움츠러드는 감정을 감출 수 없었다.
식민 시기에 근대적 경제성장이 이뤄졌다고 주장하는 이른바 '식민지근대화론'(당사자들은 이런 호칭을 탐탁치 않게 여기므로 ''를 쳤다)도 이런 입장에 서 있다. 이들은 많은 비난을 받는다. 그러나 이들은 수치로 보면 분명히 이 시기에 GDP는 성장했으며, 그 팩트를 무시하는 것은 어린애가 혼자서 고집을 부리는 것과 다름없다고 말한다. 또 식민지 시기 근대적 경제성장(인구와 1인당 생산이 동시에 30~40년 동안 지속 성장하는 상태)이 이뤄졌다는 사실과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는 것과는 다른 말이라고 본다. 다시 말하면 식민지배는 당연히 비판받아야 하지만, 그 시기 경제성장(연평균 GDP 2.3% 증가)이 이뤄진 것은 사실이라는 말이다. 이런 주장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또 대체로 일제의 지배로 이뤄진 근대화가 해방 후 고도성장에도 영향을 끼쳤다고도 본다. (기사참조)
이런 주장과 논리는 탄탄해서 쉽게 반박이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만약 '근대'가 또 다른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면 완전히 패러다임 자체가 바뀔 수도 있다. 일제시대에 수치상으로 늘어난 GDP 대신, 우리는 우리가 가진 어떤 긍정적 의미의 근대를 빼앗겼는지. 또 우리나라의 경제 고도성장이 꼭 일제에 의한 강제적 근대화나 박정희식 경제성장 정책에 힘입은 것인지, 아니면 우리가 본래 가지고 있던 근대적 속성이 마침 세계경제의 활황 등 좋은 기회를 맞아 폭발적으로 발현된 것인지... 나아가 우리는 옛 근대로부터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갈 동력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앞서 소개한 3가지 책들에서 말하는 '근대'가 꼭 좋았던 것만은 아니다. <중국화 하는 일본>이 소개하는 '근대'는 기회의 평등을 주었을 지언정, 나머지 결과는 개인이 알아서 하라고 던져놓았다. 이것이 중국화, 신자유주의, 하이에크의 생각과도 비슷했다는 저자의 통찰력(나보다 2살밖에 안 많은..ㅠ)이 놀랍다. 반면 일본식 봉건제는 다 같이 못살고 굶더라도 울타리 안으로만 들어간다면 공동체 구성원들을 보듬어 주었다. 이것이 오히려 사회주의와 가깝다. 어쨌건 이 책들은 역사조차도 "고대 -> 중세 -> 근대"라는 서구적 도식으로 이해해야만 했던 사고 틀을 넓혀준 계기였던 것 같다.
2013-06-30
“[책과 삶]1000년간 ‘중국화’에 역행한 일본, 휘청거릴 이유 있었다
황경상 기자 yellowpig@kyunghyang.com
◆ 중국화 하는 일본
요나하 준 지음·최종길 옮김 | 페이퍼로드 | 310쪽 | 1만4800원
왜 소니는 삼성에 추월당했을까. 2011년에 접어들면서 중국의 국내총생산(GDP)도 일본을 확실히 넘어섰다. 3·11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 사건은 ‘최후의 일격’이었다.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근대화를 이뤄 부러움의 대상이자 롤 모델로 여겨졌던 일본이 휘청대는 이유는 무엇일까.
역사학자인 저자는 이 모든 일들이 갑자기 벌어지지 않았다고 말한다. 이미 1000년 전부터 일본은 근대화에서 뒤처져 있었다는 것이다. 이때 ‘근대’는 상식과는 다르다. 흔히 근대의 출발을 르네상스라고 보지만, 저자는 중국 송나라(960∼1279)가 세계에서 가장 먼저 근대로 들어섰다고 본다.
송나라의 무엇이 이전과 달리 ‘근대’라 부를 수 있을 만큼 획기적이었을까. 송나라는 귀족제도를 없애고 과거시험으로 관료를 뽑기 시작했다. 노력만 하면 지배층으로 상승할 수 있었으니 신분제의 철폐, 즉 기회의 평등이 이뤄졌다. 모든 관료는 황제의 신하였기에 철저한 중앙집권이 가능하기도 했다. 황제의 무소불위 권력은 주자학으로 견제됐다. 황제는 주자학이 말하는 성인의 행동거지를 가장 잘 체화한 자이므로 신하들은 이에 어울리는 행동을 요구할 수 있다. 황제를 중심으로 일극화된 정치질서와는 달리, 경제와 사회제도는 철저하게 자유를 보장했다. 개혁파 재상 왕안석이 실시한 청묘법은 자유시장을 활성화시켰다. 백성들에게 저리 융자를 준 뒤 나중에 수확물을 시장에 갖다 팔아 생긴 화폐로 갚도록 했기 때문이다. 화폐경제가 활성화되면서 백성을 한 곳에 가둬 노역에 종사시키던 자급자족적 장원 경영은 무너졌고, 귀족의 경제적 기반이 붕괴됐다. 저자는 이처럼 1000년 전에 최고의 선진국으로서 시스템을 구축한 ‘차이나 스탠더드’에 세계가 발 맞춰 따라가는 것을 ‘중국화’라고 명명한다. 유럽의 근대 계몽주의조차 송나라에서 체계화한 근세유학, 즉 신보다 이성을 사고의 중심에 두는 철학을 재구성한 것이란 설도 있다. 르네상스의 3대 발명품이라는 화약, 나침판, 활판인쇄는 모두 송나라가 앞서 내놓았다. ‘후진지역’이었던 유럽은 식민지로부터 대량의 은을 약탈해 일어난 산업혁명 이후에야 겨우 중국을 추월한다. 그것도 잠시, 중국은 이제 다시 대국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기원을 따져보면 놀랄 일이 아니라 세계가 원래 질서로 되돌아가고 있는 셈이다. 구사회주의권이 붕괴하자 ‘역사의 종언’이란 말이 나왔다. 그러나 이 탈냉전의 세계는 ‘송나라 스타일’의 축소·복사판이라는 것이 저자의 시각이다. 정치 질서는 미국 중심으로 일극화됐고(황제), 세계적 규모의 시장경쟁 자유가 우선된다(경제·사회적 자유). 주자학의 방식도 남아 있다. 버락 오바마에게 노벨상을 주면서 ‘세계 최고의 대국답게 행동해 달라’고 읍소하는 것이다. 현대 중국을 떠올려봐도 비슷하다. 무슨 장사든 해도 좋지만 ‘당’에 대한 비판만은 절대 금지다. 역사는 이미 1000년 전에 ‘종언’을 고했던 셈이다. 반면 일본은 중국화와 반중국화 세력간의 다툼에서 중국화 세력이 패했다. 전국시대를 거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권력을 잡은 에도시대가 개막되면서 ‘중국화’와는 다른, 완전히 독자적인 노선을 걷는다. 바로 ‘에도시대화’다. 정치는 소수 지배 가문끼리 직위를 나눠 가지면서 유지됐다. 신분제는 대를 이어 유지됐는데, 소규모의 장원 안에서 자신의 경작 토지만 유지한다면 자손대대로 먹고 살 수 있었다. 다만 ‘중국화’가 기회의 평등을 주는 대신 낙오자를 가차 없이 밟아버렸다면, ‘에도시대화’는 집단 구성원들이 상호부조를 통해 결과의 평등을 지향하는 긍정적 측면도 있었다. 일본이 서구화에 몰입할 수 있었던 건 바로 중국화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중국이나 한국은 근대화에 뒤처졌던 것이 아니라 이미 ‘근대’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굳이 왜 ‘서양화’를 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물론 남녀평등이나 참정권 보장은 이뤄지지 않았지만 이는 동시대의 서양에서도 거의 달성되지 못한 상황이었다. 이와 달리 일본은 1000년 간 중국화를 지연시킨 끝에 사회 전체가 발목이 잡혀 있었다. 마침내 중국화를 감행해야겠다고 마음 먹은 시점에 서구의 물결이 밀어닥쳤다. 백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중국화와 서양화를 동시에 달성한 것이 메이지유신이다. 이후에도 일본은 ‘긴 에도시대’를 유지하게 된다. 70~80년대 중국화의 한 전형이라 할 수 있는 신자유주의가 불어닥쳤지만 일본은 그 시대흐름에는 역행했다. 이미 글로벌 스탠더드인 중국에 맞추지 못했던 일본이 이제와 뒤지는 것은 새삼 새로울 것이 없다. 이제야 일본은 책의 제목대로 다시 ‘중국화’의 길을 걷고 있다. 저자는 중국화나 에도시대화 어느 쪽을 지지하지 않는다. 중국화로 이뤄진 세계 역사를 이해해야만 이를 넘어서는 새로운 구도를 모색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일본은 메이지유신 중반쯤부터 다시 ‘에도시대화’를 택했다. 경작지에 농민을 묶어뒀던 과거와 비슷하게 종신고용·연공서열제로 노동자를 회사에 묶어두었다. 중국화가 하이에크식의 자유시장경쟁을 닮았다면 에도시대화는 케인스주의, 나아가 사회주의를 닮았다. 하이에크가 걱정한 국가에 ‘예속되는 길’은 일본에서 현실화됐다. 사회주의와 군부가 결합된 국가사회주의가 나타난 것이다. 에도시대화의 극단으로 간 것이 타국에 대한 에도시대화의 강요이며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의 시발점이었다는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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