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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모음/누런돼지

성공할 수 있다는 긍정이 개인을 피곤하게 만들어


 황경상 기자 yellowpig@kyunghyang.com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3082114435&code=960100

ㆍ한병철 독일 카를스루에 대학 교수 ‘피로사회’ 출간

“독일에서는 번아웃(burn-out·탈진) 신드롬이 유행입니다. 교수들조차도 성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면서 피곤에 지쳐 쓰러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자본주의를 이끄는 사람들이 모두 피곤으로 쓰러져서 자본주의가 망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입니다.”

한병철 독일 카를스루에 대학 교수(53)는 저서 <피로사회>(문학과지성사)의 한국어판 번역 출간 기자간담회에서 집필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권력이란 무엇인가>에 이어 두번째로 한국에서 출간된 이번 책은 2010년 독일에서 출간할 당시 철학서로는 유례없는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현재까지 8쇄를 찍었다. 독일의 유력 일간지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은 한 교수의 책을 소개하는 특집 기사를 내기도 했다.

그는 이번 책의 고갱이가 ‘자유를 통한 착취’라고 설명했다. “자본주의는 상당히 영악한 시스템입니다. 주인이 노예를 착취하는 방식의 타인 착취는 한계가 있겠죠. 자유를 주고 더 많이 일하라고 부추기면 더 많은 생산성을 얻을 수 있습니다. 강요와 통제가 아니라 자유를 주면서 착취를 하다보니 자신은 자유롭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어느새 그 자유는 강제가 되고 맙니다.”



한병철 교수가 8일 서울 태평로의 한 중식당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자신의 책 <피로사회>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문학과지성사 제공

 

▲ 현재의 피로 극복하는 길은 성과주의·자기 집착 버리고 다른 이에게 마음 여는 것

이러한 한 교수의 분석은 현대사회를 보는 독특한 시각에 기반하고 있다. 그는 여전히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프로이트, 푸코, 아감벤의 이론이 억압, 규율, 감시, 면역학 등과 같은 ‘부정성’에 기반했다고 본다. “해서는 안된다”는 금지를 중심으로 한 이론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한 교수는 지금의 사회가 “할 수 있다”는 구호가 넘쳐나는 ‘긍정성’이 지배하고 있다고 본다. 겉으로 규제와 억압은 철폐되고 개인의 욕망이 긍정되면서 자유가 늘어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는 성과주의라는 독이 숨어있다는 것이다.

“타인에 대한 착취가 진행될 때는 착취자를 없애면 되지만 자기 자신을 착취할 때는 자신을 죽일 수도 없어요. 내가 주인이면서 동시에 노예가 되는 것이고, 쓰러져 죽을 때까지 스스로를 착취하게 됩니다.”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의 전환이라는 큰 물결은 한국사회도 비껴가지 않았다. 한 교수는 책 서문에서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자기를 착취한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즉각 이해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책을 번역한 김태환 서울대 교수는 역자 후기에서 “한병철의 이야기는 한국의 현실을 이해하는 데도 매우 생산적인 의미를 지닌다”며 “학생 개개인의 창의성과 개별성을 중시하는 새로운 입시 전형 방식이 도입됐지만 입시 지옥에서 해방시켜 자유로운 주체로 길러내기보다는 더욱 더 복잡하고 불투명한 경쟁의 무대로 몰아가는 것이 상징적 사례”라고 밝혔다.

노력과 성공이라는 신화에 둘러싸인 사람들은 거기서만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한 욕구에 부응하지 못하면 좌절에 빠지고 만다. 한 교수는 “규율사회의 부정성은 광인과 범죄자를 낳는 반면 성과사회는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만들어낸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가해자일 수 있다는 생각을 못합니다. 피해자라고 생각도 안 해요. 번아웃 신드롬에 대해서도 쉬라는 얘기만 나오는데 일하기 위해 쉰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것은 노예의 쉼이고 모욕적인 것이죠.”

한 교수는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피로’ 자체에 대해 성찰할 것을 요구한다. 성과사회에서 피로는 극복해야 할 대상에 불과하지만 오히려 성과주의적 집착을 완화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나아가 한 교수는 “또 다른 피로로 현재의 피로를 극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나만 생각하다가 지쳐 쓰러지는 피로가 아니라 세계 속으로 들어갈 때 느끼는 명상적 피로가 되겠죠. 자기 속에 몰입하는 나르시즘을 극복하고 타자에게 자신을 열어나가야 우울증도 극복됩니다.” 그러나 자본주의 시스템은 이렇게 다른 것을 보지 못하도록 시야를 조작하고 있다는 것이 한 교수의 생각이다.

한 교수는 한국에서 금속공학을 전공한 뒤 독일로 건너가 철학을 공부하고 하이데거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로도 주목을 끌고 있다. 그는 현재 독일 학계에 대해서도 “철학자들이 사회에 대해 관심이 없고 연구재단에서 지원하는 비슷한 학문만을 되풀이하고 있어 철학 자체가 없어진 상황”이라며 “이론이 아니라 정보만이 넘쳐나고 있다”고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