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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모음/누런돼지

행복은 '파랑새'인가

행복이란 무엇일까. 아마 인류 역사상 요즘처럼 행복에 대한 논의가 많이 분출되고 소비되는 시절도 없을 것이다. 이제 어느 정도 배는 부른 것 같은데 왠지 옆구리 한 쪽이 허전하다, 이제 성장보다는 행복을 추구해야 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들을 하는 것 같다.  매주 '행복'이란 단어가 들어간 책들도 쏟아져 나온다.

 

그런데 이 책 <얼마나 있어야 충분한가>는 이렇게 말한다.

 

"성장의 추구에서 행복의 추구로 옮겨가는 것은 하나의 거짓 우상을 또 다른 거짓 우상으로 바꾸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개인으로서든 시민으로서든 우리의 올바른 목표는 단지 행복하려는 것이 아니라 행복할 이유를 가지려는 데 두어야 한다. 건강, 존중, 우정, 여가 등 삶의 좋은 것들을 갖는 것은 행복할 이유를 갖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없는데 행복하다는 것은 망상이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데도 삶이 잘 되어간다는 망상 말이다. 마르크스주의자는 그러한 망상을 이데올로기라 불렀으며 그것은 억압과 비참한 현실을 은폐하는 데 쓰였다. (...)

만약 행복이 잘 사는 것과 내적인 연관이 전혀 없는 그저 사적인 기분에 불과하다면, 소마나 두뇌 자극술이 가장 값싸고 효과적으로 행복을 달성해 줄 수단임이 밝혀질지도 모른다. 왜 우리의 관심이 좋은 삶에 있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행복은 스스로를 돌보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가? (206쪽)

 

마음 한 번만 바꿔 먹으면, '행복'이 우리 곁에 찾아올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행복은 마치 '파랑새'처럼 우리 곁에 있는데 발견하지 못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들을 하게 만드는 이들도 많다. 한 술 더 떠서 파랑새가 행복을 가져다 주는 게 아니라, 행복한 사람에게 파랑새가 날아든다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정말 그렇게 "잘 사는 것과 내적인 연관이 전혀 없는 그저 사적인 기분"에 불과하다면 왜 이렇게 우리 주변엔 불행한 사람들이 많을까. 다들 그렇게 멍청해서 '행복'을 가져가지 못하는 것일까.

 

'행복'은 추상적이지만 '행복할 수 있는 이유'는 추상적이지 않다. 되레 행복의 조건은 매우 구체적이다. 정말 우리가 '행복'하려면 책에서 말한대로 "건강, 존중, 우정, 여가 등 삶의 좋은 것들"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 이런 것들이 없는데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은 정말 '망상'이거나 "억압과 비참한 현실을 은폐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에 빠진 것일수도 있다.

 

맨날 밤늦게까지 야근한 뒤 집에 와서 쓰러져 자는 것이 일상이거나, 비정규직인데다 최소한의 기본적 생활을 겨우 이어갈 수 있는 임금을 받으면서 가족과 친구들을 만나 즐거운 한때를 보내거나 자신만을 위한 여가를 보낼 수는 없을 것이다. 당연히 '행복'하다는 기분을 느끼기는 어렵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생의 목표가 즐거움이라는 견해, 사람들이 평생 분주하게 활동하고 고통을 겪는 것이 즐거워지기 위함이라는 견해는 정말 이상한 생각이다."(164쪽)

 

행복은 쫓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누리는 것일 텐데, 그러기엔 우리 삶들이 너무도 피곤하다. 

 

 

 

2013-06-15 

[책과 삶]부 얻으려 만족 잃은 우리, 모두에 ‘좋은 삶’ 고민할 이유

 

황경상 기자 yellowpig@kyunghyang.com

 

▲ 얼마나 있어야 충분한가

로버트 스키델스키, 에드워드 스키델스키 지음·김병화 옮김 | 부키 | 376쪽 | 1만6000원

 

일주일에 15시간만 일하는 세상이 온다. 그 정도만 일하고도 대부분이 물질적 풍요를 누리며, 임금은 현재와 같거나 좀 더 많을 수도 있다. 인류는 이제 처음으로 경제적인 걱정거리에서 벗어나 여가 시간을 어떻게 쓸 것인지 고민하게 된다. 기술 발달로 시간당 생산량이 늘어나 필요 노동 시간은 점점 줄어들고 마침내 거의 일할 필요가 없는 단계에 이른다.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1930년에 발표한 에세이 <우리 후손을 위한 경제적 가능성>이 전망한 미래다. 케인스는 불과 100년 뒤, 즉 2030년이면 이런 여건에 도달하리라 봤다. 전망은 일부는 맞고 일부는 틀렸다. 1인당 실제 소득은 예상대로 1930년 이후 70년 동안 4배나 높아졌다. 노동시간 예측은 틀렸다. 아직도 많은 노동자들은 주 40시간 이상 일하고 있다. 노동시간이 줄어들긴 했지만 2030년이라고 해도 주당 15시간 일한다는 건 꿈 같은 얘기다.

 

케인스의 예측은 왜 틀렸을까? 우선 노동자들이 “더 적게 일해도 될 만큼 실질소득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생산성은 증대됐지만 그 혜택은 부유층이 가장 많이 가져갔다. 1970년대에는 미국 최고위 최고경영자의 보수가 평균 근로자 보수의 30배를 밑돌았지만 지금은 263배에 이른다.

 

케인스는 ‘필요’와 ‘욕구’를 혼동했다. 필요는 만족시킬 수 있지만 욕구는 무한히 늘어날 수 있다. 그러나 케인스는 물질적 욕구가 ‘충족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케인스는 ‘한계 효용 체감의 법칙’에 따라 소득이 많아질수록 추가로 얻는 소득의 만족도는 줄어든다고 봤다. 이미 충분한 소득을 벌어들이고 있는 사람들은 추가로 1시간 더 일해서 소득을 얻기보다 더 고상한 일에 1시간을 쓰리라 예상했다. 그런데 부자들은 노동시간을 더 늘려 가난한 이들보다 더 빨리 앞서 질주했다. 1000달러짜리 넥타이를 매는 이들을 조롱하며 2000달러짜리 넥타이를 사들였다.

 

끝없이 욕망을 추구하고, 끊임없이 성장을 이루려는 노력은 오늘날 칭송받는 덕목 중 하나다. 자본주의는 어떻게 보면 욕심, 질투, 탐욕 등 인간의 ‘악마적’ 속성을 동력으로 삼아 과거 어느 때보다 우리에게 풍족한 삶을 선사했다. 저자들이 “자본주의는 파우스트적 협상을 기초로 세워졌다”고 말하는 이유다. 그러나 악마와의 계약이 늘 그렇듯 자본주의는 부가 주는 진정한 편익을 빼앗았다. 바로 ‘이제 충분하다는 만족감’이 그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끝없는 욕망’의 추구가 늘 인정받았던 건 아니었다. 되레 늘 지탄과 걱정의 대상이었다. 중세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는 “돈에 대한 애착은 권력욕이나 성욕보다 더 나쁜 인간의 죄악 중에서도 최악”이라고 비난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렇게 경제적으로 만족을 느끼지 못하는 인간들을 만들어낸 것이 자본주의 탓이라고 생각했다. 자본주의가 ‘끝없는 욕구’라는 인간의 원천적 성향을 관습과 종교로부터 해방시킴으로써 불을 붙였다는 것이다.

 

여기에 경제학은 악덕의 이미지가 강한 ‘탐욕’, ‘허영’, ‘끝없는 욕구’라는 단어를 ‘이기심’, ‘효용’, ‘선호’라는 무색무취한 단어로 바꿔나갔다.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인간의 자유로운 욕망 추구가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공적 복지를 증진하게 만든다고 봤다. 경제학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인간의 무한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희소한 자원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를 연구하는 학문”이 됐다. “내가 포도주보다 코카인을 사는 데 돈을 쓰고 싶다면 그저 코카인이 내게 더 효용이 있을 뿐”이다.

 

“어떤 마을 쪽으로 걸어가고 있는 두 남자가 있다. 도중에 그들은 길을 잃었지만 그래도 계속 간다. 이제 그들에게는 오로지 함께 걸어가는 옆 사람보다 앞서겠다는 목표만 남았다.” 저자들은 이것이 우리가 처한 상황이라고 말한다. 오늘날 어떤 삶이 더 ‘좋은 삶’인가를 묻는 것은 금기시 돼 왔다.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모든 시대와 문명의 위대한 사상가들이 말했던 ‘좋은 삶’이라는 건 한 쪽 구석으로 치워졌다. 어떤 삶이 더 좋은 것인가를 공적으로 결정한다는 것은 종종 전체주의가 아닌지 의심을 받는다.

 

저자들은 왜 우리가 ‘좋은 삶’을 묻는 것을 중단해야 하는지 묻는다. 그러면서 좋은 삶을 위한 일곱 가지 기본재로 건강, 안전, 존중, 개성, 자연과의 조화, 우정, 여가를 든다. 사람들이 이 기본재를 쉽게 얻을 수 있도록 돕는 경제구조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방법으로는 주당 노동시간의 제한과 일자리 나누기, 조건 없이 지급되는 기본소득 등을 꼽는다.

 

우리에게 쾌락주의자로 알려진 에피쿠로스는 오히려 “충분한 것을 너무 적다고 여기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많은 것도 충분하지 않다”고 말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주장에 사람들이 더 게을러지고 창조성은 사라질 것이란 반론을 펴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모든 창조성과 혁신을 ‘돈’으로 자극해야 한다고 믿게 된 것은 상상력이 빈곤한 탓이라는 게 저자들의 주장이다. 고대 아테네와 로마에는 생산성이 낮더라도 정치, 전쟁, 철학, 문학에서 최고 수준으로 왕성한 시민들이 있었다.

 

오히려 과거에는 노예와 여성의 희생에 기대어 소수 엘리트만 그런 생활이 가능했다면 지금은 다르다. 우리는 역사상 처음으로 모두에게 ‘좋은 삶’을 선사할 수 있는 물질적 능력을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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