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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모음/누런돼지

우리는 모두 기본소득주의자?

기본소득에 대해 아는 건 별로 없다. 그런데 어제 기사 <“일자리·복지로는 한계… 국민 누구든 먹고살 기본소득을 달라”>를 보면서 반가운 마음에 문득 지난 번 인터뷰한 기사가 떠올랐다. (두진이를 낳은 뒤 병원에서 기사를 마무리했기 때문에 더 기억에 남는 것일지도...ㅎㅎ)

 

그때 인터뷰한 제임스 퍼거슨 스탠포드대 교수는 인상 깊은 말을 많이 했다. 기사에 미처 쓰지 못한 말들을 메모해 둔다.(통역으로 받아 친 것을 이해하기 쉽게 다소 윤문을 했음을 밝혀둔다. 그 과정에서 혹 내가 잘못 이해한 것이 있을 수도 있으니 양해하시길...)

 

인상 깊었던 농담은 바로 이것.

 

"이런 우스개가 있다. 미국 남부의 한 마을에 직물회사가 있었다. 원래는 이 직물회사에 모든 마을 주민들이 다 고용이 돼 있었다. 그런데 기계화와 자본집약화가 진행되면서 결국 이 공장에는 사람 하나와 개 한 마리만 필요하게 됐다. 사람은 개한테 먹이를 줘야 하기 때문에 필요하고, 개는 사람들을 기계 가까이 못 오도록 쫓아내기 위해서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만큼 이제 말 그대로 '노동자'되기도 힘든 시절이다. 정규직은 말할 것도 없고 비정규직, 계약직 자리 하나 얻는 것도 하늘의 별 따기다. 그래서 퍼거슨 교수는 이런 말을 한다.

 

"현재 임금노동이 기본이 아닌 시대에서 너무나도 많이 등장하는 것이 경제고아다. 이 시대는 경제고아가 넘쳐나고 있다. 그러면 이 경제고아들을 내칠 것이냐. 예전에 우리가 고아들을 모아서 쓰다듬고 보듬고 연대했듯이 사실 경제고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접근이 이뤄져야 한다는 논리가 등장하는 것이다 (...) 기본소득 주창자들은 (임금노동자가 아닌) 잉여라는 이 사람들이 이미 사회의 다수가 됐다면 다시 봐야 하는 것 아니냐는 거다."

 

말 그대로 "나의 노동을 더 이상 이 사회가 요구하지 않는" 세상이 됐다. 고전적으로 사회주의와 공산당은 노동자와 대중을 동일시하지만, 문제는 "우리가 노동자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은 너무나도 오히려 혜택을 받는 범주가 됐다"는 것이다. 따라서 꼭 노동을 해야만 우리가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가, 이 세상에, 이 땅에 살아가는 것만으로 우리는 뭔가를 주장할 수 있는 건 아닌가 하는 고민이 생긴다.

 

"알래스카는 내가 거기 살고 있는 사람이고 등록이 돼 있으면 거기 있다는 이유로 알래스카의 자원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받는다. 예를 들어 보자. 한 농부가 자기 땅에서 사탕무를 재배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탕무를 경작하다가 갑자기 그 땅에서 석유가 솟아났다. 그러면 그 석유는 나의 정당한 노동에 대한 가치라고 볼 수 있는가. 그건 아마도 지금 내가 이 땅에 살고 있기에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실제, 현재 돌아가고 있는 산업 자체가 이렇게 석유가 샘솟는 현상과 비슷하다. 이제는 절대 다수의 노동력이 아니라, 몇 명의 소수정예가 굉장히 복잡하게 머리를 굴려서 마술과도 같이 돈이 뿜어져 나온다. (...) 과거에 직물공장에서 모든 사람들이 일했을 때, 우리는 진정한 노동자이고, 우리의 손때가 묻은 공장은 우리의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말로 이제는 소수의 몇 사람들이 거대기업을 굴린다고 했을 때, 다시 이 기업은 나의 것이다 라고 주장하면 폭력적인 주장이 된다. 그랬다면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떨거지가 되는 거다. 더 억압적인 주장이 되는 것이다."

 

더구나 우리는 이미 모두 '기본소득'에 동참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무슨 소리냐 할 지도 모르겠지만 한 번 들어보시길.

 

"문제는, 실제로 경제학자들은 눈치채지 못하는데, 인류학자들은 조금만 들여다보면 아는 현상이 있다. 바로 포멀섹터(정규직 등)에 있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은 사회부조에 가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친지, 가족 등 빌붙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다. 자기가 받고 있는 임금으로 부양해야 할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아지고 있다. 재밌었던 건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기본소득을 입안한 대표적인 집단 중 하나가 노동조합이었다는 거다. 어차피 부양할 사람이 너무 많아 내가 죽게 생겼는데, 그러자면 공식적으로 나라에서 그들에게 줘라, 차라리 나는 그만큼 세금을 내겠다고 나오는 거다."

 

그렇지 않은가? 한국에서는 가장 많은 유형이 아마도 부모님에 기대는 것일테다. 50대의 탄탄한 정규직 직장을 갖고 있는 부모님들이 취직 못하는 20대 자식들에게 바로 현금 혹은 현물을 쏴 주지 않는가. 그만큼 세금을 거둬서 공평하게 사람들에게 주면 그게 바로 기본소득이다. 물론 내 자식 입에 들어가는 건 아깝지 않지만, 누군지 모를 놈에게 돌아가는 돈은 낼 수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뭐 어쨌거나 이치는 그렇다는 얘기다.

 

이 분이 바로 제임스 퍼거슨 교수님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12042135425&code=960201

 

[2012-12-04]“정규직 기반 복지국가, 구조조정 확산에 한계 봉착”

 

ㆍ인류학자 제임스 퍼거슨 교수 연세대 초청 강연
ㆍ“‘기본소득’ 보장으로 양극화 해소할 새 모델 찾아야”

 

‘고용 없는 성장’이 계속되면서 오늘날 ‘정규직 임금노동자’조차도 얻기 쉬운 지위는 아니다. 상당수는 비정규직, 시간제근무, 아르바이트, 그것도 아니면 실업자나 노숙자 혹은 ‘잉여’로 살아간다. ‘불안정한(precarious)’과 ‘프롤레타리아트(proletariat)’를 합성한 ‘프레카리아트’라는 말도 나돈다. 문제는 이런 양극화를 해소하겠다는 ‘복지국가’ 모델조차도 정규직 임금노동자가 사회의 절대적 다수였던 시절에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제임스 퍼거슨 미국 스탠퍼드대 교수(53·인류학·사진)는 지난주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초청 강연(29일)과 한국문화인류학회 가을학술대회(11·30~12·1)에 참석해 이런 문제의식을 펼쳐냈다. 퍼거슨 교수는 지난달 29일 연세대 강연 전 인터뷰에서 “남아프리카공화국처럼 실업률이 40%가 넘는 나라에서 임금노동을 기반으로 하는 북유럽식 복지모델을 따라갈 수는 없다”고 말했다.

 

본래 유럽식의 사회보험제도는 정규직 임금노동자를 중심으로 시행됐다. 이들의 배우자·자식은 피부양자로 복지에 편입됐다. ‘정규직 노동자와 그의 가족’을 중심으로 사회적 문제를 관리하는 태도는 오랜 역사적 경험에서 비롯됐다. 그러나 일부 유럽에서조차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의 확산으로 ‘정규직 임금노동자’라는 복지국가의 기반이 허물어져가는 것이 현실이다. 그가 남아공에서 찾아낸 건 바로 그 이후 우리가 개척해 나가야 할 ‘미래’다.

 

퍼거슨 교수는 남아공의 ‘현금지급식’ 사회부조를 소개한다. 남아공은 전 인구의 30%인 1500만명의 국민들이 정부의 보조금을 받고 있다. 극빈지역은 75%가 넘는다. 아동지원보조금의 경우 결혼 유무를 따지지 않으며, 아이를 가장 적극적으로 돌보는 자인지 여부만을 조사한다. 현재는 모든 국민에게 매달 15달러 수준의 현금을 지급하는 기본소득(재산·노동 유무에 관계없이 모든 국민에게 매월 생활을 충분히 보장하는 소득을 지급) 정책까지 입안돼 있는 상황이다.

 

우파들은 ‘공짜’로 제공되는 복지가 의존성만을 조장한다고 말하고, 좌파들은 현금 지급이 사람들을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세계로 몰아넣어 타인과의 연대를 불가능하게 한다고 비판한다. 이에 퍼거슨 교수는 “기본소득과 같은 정책은 아예 배제된 자들이 사회적 관계 속에 돌아올 수 있게 만든다”고 반박한다. “예컨대 교통비가 부족해서 장소 이동조차 자유롭지 못한 이들은 결국 고립됩니다. 이들에게 현금을 지급해 다른 사람을 찾아가는 데 쓰게 만들면 다시금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이는 적은 액수라도 삶을 굉장히 변화시킵니다.”

 

퍼거슨 교수는 “지금 우리가 노동자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은 오히려 너무나도 혜택을 받고 있는 부류”라며 “남아공에서도 보듯 절대 다수의 사람들은 노동자의 부류에도 속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이는 “노동자가 곧 대중이라고 볼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소위 ‘잉여’라 불리는 사람들이 이미 사회의 다수가 됐다”는 사실도 지적했다. “이 사람들을 여전히 국가 바깥의 소외된 존재로 봐야 할까요, 아니면 기본소득을 지급해 이들을 자기 몫을 요구할 수 있는 사회의 구성원으로 다시 인정해야 할까요. 어떤 것이 옳다 그르다 할 수는 없지만 기본소득의 입장은 임금노동자 중심의 정책에서는 볼 수 없는 급진적인 정치의 포문을 열 수도 있는 것입니다.”

 

물론 여전히 ‘노동’을 하지 않는 이에게 ‘소득’을 지급한다는 게 불편할 수 있다. 퍼거슨 교수는 이런 예를 든다. “미국 알래스카 주민들은 단지 그곳에 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알래스카에서 나오는 자원에 대한 소득을 받습니다. 전통적인 노동가치설은 노동 외에는 가치를 창출하지 못한다고 하지요. 하지만 사탕무를 재배하고 있는 농부가 자신의 땅을 경작하는 과정에서 석유가 솟아난다면 그것은 노동으로 생긴 가치인가요, 아니면 그 땅에 살고 있기에 생긴 가치인가요. 내가, 우리의 조상이 이 자연을 가꿨고 여기가 내가 사는 땅이라는 이유로 그곳에서 생산된 가치에 대한 권리주장을 할 수도 있습니다. 과거의 노동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새로운 분배를 정당화할 수 있는 언어를 찾아야 합니다.”

 

남아공의 기본소득 입안자들이 본래 신자유주의자들로 분류되는 이들이라는 점도 눈여겨봐야 할 부분이다. 퍼거슨 교수는 모든 것을 신자유주의 혹은 자본주의라는 거대 ‘괴물’의 탓으로 돌리면 “새로운 정치적 상상력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그것은 곧 과거의 ‘노동’이나 ‘복지국가’ 패러다임에 갇혀 신자유주의 비판만 하는 사이 프레카리아트의 고통은 가중됐다는 의미로도 읽힌다. 그는 “어떤 곳에서는 개혁적으로 보이는 것이 어떤 곳에서는 반동적으로 비칠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는 “누구나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는 ‘완전고용’을 고집하며 떠들어대기보다 어떤 의미에서 보다 더 급진적인 목표를 추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바로 모든 사람에게 ‘밑바닥’을 깔아 주는 일이다. “누구나 기본적인 수입을 올리고, 기본적인 교육·의료 등을 받는 토대를 구축하고 그 위에서 어떤 이는 정규직, 또 다른 이는 비정규직, 또 다른 이는 비정부기구 활동을 할 수 있게 만드는 겁니다. 다르게 살아갈지라도 출발점은 같게 하자는 거죠.”

 

글·사진 황경상 기자 yellowpi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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