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잊고 있었던 이름이 <그것이 알고싶다>와 그에 힘입은 실시간 검색어에 덕에 되살아났다. '형제복지원'
이번 그것이 알고싶다는 보지 못했지만, 사람들에게 많은 파장을 불러일으킨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2년 전 형제복지원의 생존자 한종선씨가 쓴 <살아남은 아이> 출간 당시 이 책을 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공동저자 전규찬 선생님과 함께 저자 인터뷰를 했다.
기사가 나오고 난 뒤 당시 "살아남은 아이의 책 제목처럼 꿋꿋하게 살아남아 보이겠습니다"라는 메시지를 한종선씨께 받았다. 보잘것 없는 내게 그런 문자를 보내주셔서 오히려 내가 힘이 됐다.
<그것이 알고싶다> 방영으로 인해 당장 뭔가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계속해서 그의 목소리가 메아리가 돼 울리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살아남은 아이'의 꿋꿋함을 보여주는 것이리라.
그 꿋꿋함은 결국 누군가가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어주는 것 자체가 세상을 바꿔나갈 수 있다는 믿음의 가장 큰 증거일테다. 세상을 바꾸지 못하더라도 한 인간의 삶은 적어도 바꿀 수 있다.
종선씨는 인터뷰 중 이렇게 말했다.
"교수님이 글 쓰는 게 많이 힘들지 않았습니까 물었을 때 제가 그랬죠. 죽지 않으니까 괜찮습니다. 고통은 힘들더라도 그 안에서 겪었던 것에 비하면 견딜 수 있는 정도였어요."
"분노에 뻗쳐서 사이코패스가 되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교수님은 어떤 실망을 할까. 그런 것이 내 머릿속에 다 있습니다. 그것 때문이라도 일단 끝까지 버텨야 해요."
형제복지원 생존자 한종선씨가 쓴 <살아남은 아이> 표지. 그다지 많이 팔리진 못했다고 한다. <형제복지원> 사건에 관심 있으신 분은 꼭 한 번 읽어볼 것을 권한다. 사건 특성상 생존자가 멀쩡한 정신으로 남아 자신의 기억을 서술할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어쩌면 기적이다.
아래는 당시 썼던 기사
9세 때 강제수용 ‘형제복지원’ 생존자, 그는 아직도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해
한종선씨가 1984년 부산 형제복지원에서 경험한 구타 장면을 묘사한 그림. 한씨는 3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음에도 당시 복지원에서 자행된 고문과 형벌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
ㆍ‘살아남은 아이’ 낸 한종선씨·전규찬 교수
1984년, 당시 9살이던 한종선씨(37)는 영문도 모른 채 누나와 함께 검은 지프차에 태워졌다. ‘집에 가고 싶다’고 하자 뺨에 손바닥이 날아왔다.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한씨가 끌려간 부산 형제복지원은 겉으로 사회복지시설임을 내세웠지만 일상적 인권유린이 벌어지는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소대 단위로 편제된 이 ‘수용소’는 중대장·소대장·총무·조장 등의 위계서열로 관리됐다. 관리자들은 ‘한강철교’ ‘전깃줄’ 등의 기합을 주거나 한겨울에 맨몸 위에 찬물을 뿌리기도 했다. 이유는 없었다. 때론 날이 침침하다며 매타작이 이어졌고 맞아 불구가 된 사람도 있었다.
12살짜리 누나는 성적 유린을 당하고 정신을 놓았다. 주변 산에는 맞아 죽은 이들의 새로운 무덤이 계속 생겨났다. 전국 최대 규모의 형제복지원은 많을 때는 3900명을 수용하면서 매년 국가로부터 19억원을 지원받았다. 전두환 정권은 올림픽 등 국가적 행사의 성공을 위해 ‘사회정화’를 내세웠다. ‘내무부 훈령 410호’에 따라 떠돌이·앵벌이·거지·행려병자 등의 ‘부랑인’들을 잡아들여 이곳에 가뒀다.
1987년에야 형제복지원의 실상이 세상에 알려졌다. 10여년 동안 513명이 복지원에서 죽어나갔다고 밝혀졌다. 그러나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을 비롯해 부산시장까지 형제복지원 원장인 박인근의 구제에 나섰다.
결국 박인근은 횡령 등의 죄목으로만 징역 2년6월을 선고받았다. 인권 유린에 대해서는 “내무부 훈령에 따른 적법한 행위였다”며 무죄 처분했다. 한창 조사 중일 때 당시 대통령 전두환은 “거리에 거지를 없앤 훌륭한 사람”이라며 박인근을 칭찬했다. 아직도 박인근은 사회복지사업에 열심히 나서고 있다.
형제복지원은 역사의 뒤안길로 묻혀진 듯했다. 생존자 중 거의 유일하게 당시의 기억을 제정신으로 증언할 수 있었던 한씨는 올해 여름부터 국회 앞 1인 시위에 나섰다. 그러나 아무도 ‘흘러간’ 사건에 주목하는 이가 없었다. 15일쯤 됐을까, 한 사람이 나타나 한씨에게 권유했다. “당시의 기억을 토대로 글을 써 보세요. 난 그걸 논문으로 써 보겠습니다.” 바로 전규찬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였다.
한씨는 그 길로 1인 시위를 접었다. 경북 구미의 집으로 내려가 바로 공책을 샀다. 초등학교도 검정고시로 졸업한 그는 글쓰기를 배운 적이 없었지만 첫 장을 펴자마자 줄잡아 열 장을 써내려갔다. 그러고는 3일 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당시의 기억이 생생히 떠올랐기 때문이다. 전 교수는 가끔씩 내려가 ‘숙제검사’를 했다. ‘빠따’는 어떻게 맞았는지, 고문과 형벌은 어떤 형태였는지 그림으로 그려보라고도 제안했다.
그렇게 나온 <살아남은 아이>(문주)는 한씨의 수기를 앞에 내세우고, 당시 시대상과 사건의 맥락을 짚은 전 교수의 논문이 이어지는 방식으로 구성됐다. 여기에 반복되는 사회복지시설의 문제를 다룬 인권활동가 박래군씨가 글을 덧붙였다. 그간에도 여공과 성매매집결지 여성, 판자촌 도시빈민 등 이른바 ‘하위주체’의 삶을 복원하는 구술사 연구는 있었다. 하지만 학자들이 본인의 이야기를 위해 그들의 이야기를 갖다 쓰는 방식이었다. 전 교수는 한씨를 ‘대상’이 아닌 ‘주체’로 불러 ‘대화적 글쓰기’를 시도했다. ‘후견인 혹은 해설자’를 자처했고, 자신이 가진 ‘명망’으로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역할만을 했다.
26일 전 교수의 연구실에서 두 사람을 만났다. 전 교수는 “최근에 벌어진 주폭 단속이나, 박근혜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가 내세운 ‘안전한 국가’에서 여전히 단속과 배제 담론을 느낄 수 있다”고 했다. 지금도 간간이 터지는 대규모 복지시설 비리는 ‘형제복지원’이 ‘오래된 미래’임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그 단속과 배제의 대상은 언젠가 ‘우리’가 될 수도 있다. 형제복지원에 갇힌 이들 중에는 “일찍 귀가하지 않고 거리를 배회한다”는 이유로 끌려온 평범한 회사원도 있었다. 자갈치시장의 노점상, 농촌에서 흘러든 일용직 노동자, 심지어 국가보안법 위반자까지도 잡혀왔다. 자활 능력이 없는 사람은 10%도 되지 않았다. 대부분 실적을 위해 강제로 잡혀 온 이들이었다.
“조르조 아감벤을 들어 수용소나 죽음을 말하는 진보담론은 있지만, 실제 우리 사회에서 희생됐거나 희생되고 있는 자들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형제복지원 사건을 말하면 ‘도가니 2’아니냐며 아는 체할 뿐이죠. 둘의 차이나 공통점을 말하고 사유하지는 않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폴란드의 홀로코스트 기념관을 아시아에서 가장 많이 찾는다지만 막상 집단학살이나 사회적 죽음에 대해 말하는 법이 거의 훈련돼 있지 않습니다. 작가나 예술가, 지식인과 저널리스트들이 제대로 된 서사를 만들어내지 못했기 때문이죠.”
한씨에게도 이번 작업은 특별했다. 그는 복지원 생각이 날 때마다 머릿속에 ‘칼’이라는 단어가 메아리쳤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책에서 “나는 결코 사회의 잠재적 범죄자, 사이코패스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인터넷 게시판의 ‘죽고 싶다’는 고민상담 글에 자신의 경험을 소개하며 위로하는 댓글을 달아주기도 한다. “여의도 묻지마 칼부림 사건을 뉴스로 봤어요. 소통하고 이야기할 사람이 있었다면 그 사람도 칼을 잡는 대신에 피켓을 들었을 겁니다.”
한종선씨(왼쪽)와 전규찬 교수가 지난 26일 전 교수의 연구실에서 한씨가 직접 만든 형제복지원 모형 앞에 앉았다. | 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 |
전 교수는 “정말 사회 안보를 위해서는 어떻게 잠재적 범죄자들을 실제 범죄자가 안되도록 경로 변경을 시킬 수 있을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말했다.
“여전히 문제 해결은 되지 않았지만 종선씨도 사이코패스가 아닌 소설가, 예술가, 창작자로 바뀌었잖아요. 다른 경로로 희망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건 말을 들어주고 그들을 인간으로 대면하고자 하는 용기에서 비롯됩니다.”
한씨는 대화 도중 ‘추위’를 호소했다. 그는 아직도 복지원 시절의 후유증으로 작은 추위도 견디지 못하고 한낮에도 전깃불을 켜놔야 안심이 된다고 했다.
허리를 다쳐 기초생활수급비만으로 생활하면서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는 아버지와 누나를 돌봐야 하는 현실도 변함이 없다. 시간이 많이 지나 박인근 개인에게 책임을 묻기도 어렵고, 특별법 제정으로 국가의 배상 책임을 이끌어낼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그럼에도 그는 “끝까지 버티겠다”고 말했다. 이제 그는 잊혀진 ‘무명씨’가 아니라 ‘한종선’으로 사회 속에 걸어들어왔기 때문이다.
<황경상 기자 yellowpig@kyunghyang.com>
그리고 당시 모두 싣지 못했던 책 안의 그림들. 종선씨가 직접 그렸기 때문에, 그의 말에 대한 신빙성을 높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만큼 그 기억이 아주 생생하다는 것일수도. 끔찍하지만, 몇 장 올려본다. 임신부나 노약자, 청소년들은 가급적 스크롤를 피하실 것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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