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경상 기자 yellowpig@kyunghyang.com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2072119505&code=960201
ㆍ정약용 탄생 250주년… 다산연구소 박석무 이사장
200년 전 조선시대에 또 한 명의 ‘송경동’이 있었다. 황해도 곡산의 이계심(李啓心)이라는 농민이었다. 그는 터무니없는 세금을 매긴 관아에 맞서 1000여명이 넘는 백성들을 이끌고 항의시위를 벌였다. 곧 체포령이 떨어졌다. 이때 새롭게 곡산 부사로 부임한 이가 다산 정약용(1762~1836)이다. 도망 다니던 이계심은 다산의 부임 행렬이 곡산에 들어서자 불쑥 나타났다. 길목을 막아선 그는 그간의 병폐를 기록한 호소문을 내밀었다.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70)은 691번째 ‘풀어쓰는 다산이야기’에서 이 일화를 소개했다. ‘희망버스’를 이끈 송경동 시인과 조선시대 농민 이계심은 실정법을 어겼지만 모두 ‘정의’를 믿고 행동했고, 자수했다. 그러나 이계심은 차가운 감방에 갇힌 송경동과는 달랐다. 다산이 호소문을 뜯어보고 “관의 잘못에 당당히 항의해 불이익을 감수한 정의로운 행위고 오히려 상을 받아야 한다”며 무죄석방했기 때문이다.
박 이사장은 “다산이 살아있다면 자수한 사람은 도망갈 이유가 없으니 ‘몸은 풀어주고 재판을 받게 하라’고 분명히 소리칠 것”이라고 말한다. 9년째 그는 한 회 빠짐없이 다산의 육성을 죽비삼아 답답한 현실을 내리치고 있다. 35만명이 넘는 독자가 e메일을 등록해 받아보고 있는 이 칼럼이 지난 6일로 700회를 맞았다.
박 이사장은 700회 칼럼에서 최근 다산의 배교(背敎) 논란을 재조명한 최근 KBS <역사스페셜> 방영 내용을 반박하며 다산을 천주교 신자로 보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했다. 그는 “(다산이) 천주교에 빠졌던 한때가 있었으나 제사 문제를 계기로 천주교와는 완전히 결별했다”며 “천주교를 신봉했다면 다산의 논리는 파탄 지경에 이르렀을 것”이라고 밝혔다.
올해는 다산 탄생 250주년. 40여년간 다산 연구에 매진해온 박 이사장의 감회는 남다를 수밖에 없다. 나라 안팎에서는 ‘월가 점령’ 시위처럼 새로운 세상을 외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고 선거철도 목전이다.
지난 5일 서울 순화동 다산연구소에서 만난 박 이사장은 다산의 사상에서 앞으로의 갈 길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다산이 <경세유표>에서 표방한 ‘신아구방(新我舊邦·나라를 혁신함)’이야말로 한국사회를 개혁하자는 최근의 ‘2013년 체제’ 논의와도 부합합니다. 87년 체제가 우리 사회에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켰지만 많은 부분이 후퇴했습니다. 코페르니쿠스적 개혁이 다시 필요합니다.”
33세의 다산은 암행어사가 돼 경기 북부를 돌아본 뒤 정조에게 보고서를 제출한다. 박 이사장은 피폐한 백성들의 삶을 목도한 뒤 쓴 이 글 속에 우리가 나아갈 방향이 들어있다고 말한다. 바로 ‘이존국법 이중민생(以尊國法 以重民生)’, 즉 “국법을 존엄하게 하고 민생을 무겁게 여겨야 한다”는 말이다. “철저한 법집행은 민생을 어렵게 만들고 민생만 살피면 국법이 무너지기도 합니다. 다산은 정치력의 핵심이 바로 두 가치를 조화시키는 데 있다고 여긴 것이죠.”
경제정책도 마찬가지다. 박 이사장은 다산의 경제정책 핵심을 ‘손부익빈(損富益貧)’이라고 소개했다. “부자의 것을 덜어서 가난한 사람에게 더해야 한다”는 것이고 그 방법은 바로 토지의 국유나 공전(公田) 제도였다. “시장에 모든 것을 맡겨두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비정규직이 900만명에 육박하고 노동착취가 벌어지고 있는데 이에 반대하는 시위를 불법이라고만 하면 안 되죠. 법을 지킬 수 있게끔 해 줘야 법이 법으로 설 수 있습니다. 결국 민생과 국법의 조화가 필요하고 국가의 적절한 개입이 필요한 것이죠.”
역사학자 정인보는 다산의 학문을 ‘민중적 경학’이라고 했다. 일반 백성들이 몸소 실천이 가능한 이론, 학문, 경전해석에 힘썼다는 것이다. 관념보다는 실재를 중시하고 제도개혁과 기술개발을 강조한 것도 그런 맥락이다. 어쩌면 뛰어난 휴머니스트적 기질 때문인지도 모른다. 다산은 죄인에게 고문과 칼 씌우기를 금지하고 병과 굶주림, 혹한과 혹서에 시달리는가를 살폈다. “곧 처형될 죄인이라도 자식이 없다면 부인과 합방의 기회를 주기도 할 정도였습니다.”
다산은 초로의 나이에 유배생활에서 벗어난 뒤 ‘사암(俟菴)’이라는 호를 사용했다. 경전에서 따온 말로, 먼 훗날 성인들이 자신의 학문을 보더라도 잘못됐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다. “당장은 안 쓰이더라도 다음 시대에는 다를 수 있으니 기다린다는 뜻이죠.” 다산은 “매미는 봄과 가을을 알지 못한다”는 <장자>의 말을 역사변혁의 근거로 삼았다. 여름 한철만 아는 매미는 세상의 변화를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봄과 가을, 겨울은 찾아온다는 것이다. 지금은 다산이 바라던 그 시대인가. 필생의 작업으로 <다산 전기>를 집필하려는 박 이사장의 영원한 숙제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2072119505&code=960201
ㆍ정약용 탄생 250주년… 다산연구소 박석무 이사장
200년 전 조선시대에 또 한 명의 ‘송경동’이 있었다. 황해도 곡산의 이계심(李啓心)이라는 농민이었다. 그는 터무니없는 세금을 매긴 관아에 맞서 1000여명이 넘는 백성들을 이끌고 항의시위를 벌였다. 곧 체포령이 떨어졌다. 이때 새롭게 곡산 부사로 부임한 이가 다산 정약용(1762~1836)이다. 도망 다니던 이계심은 다산의 부임 행렬이 곡산에 들어서자 불쑥 나타났다. 길목을 막아선 그는 그간의 병폐를 기록한 호소문을 내밀었다.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70)은 691번째 ‘풀어쓰는 다산이야기’에서 이 일화를 소개했다. ‘희망버스’를 이끈 송경동 시인과 조선시대 농민 이계심은 실정법을 어겼지만 모두 ‘정의’를 믿고 행동했고, 자수했다. 그러나 이계심은 차가운 감방에 갇힌 송경동과는 달랐다. 다산이 호소문을 뜯어보고 “관의 잘못에 당당히 항의해 불이익을 감수한 정의로운 행위고 오히려 상을 받아야 한다”며 무죄석방했기 때문이다.
40여년간 다산 정약용을 연구해온 박석무 이사장은 “필생의 사업으로 다산의 일대기를 정리하고 싶다”고 말했다. | 김정근 기자 jeongk@kyunghyang.com
박 이사장은 700회 칼럼에서 최근 다산의 배교(背敎) 논란을 재조명한 최근 KBS <역사스페셜> 방영 내용을 반박하며 다산을 천주교 신자로 보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했다. 그는 “(다산이) 천주교에 빠졌던 한때가 있었으나 제사 문제를 계기로 천주교와는 완전히 결별했다”며 “천주교를 신봉했다면 다산의 논리는 파탄 지경에 이르렀을 것”이라고 밝혔다.
올해는 다산 탄생 250주년. 40여년간 다산 연구에 매진해온 박 이사장의 감회는 남다를 수밖에 없다. 나라 안팎에서는 ‘월가 점령’ 시위처럼 새로운 세상을 외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고 선거철도 목전이다.
지난 5일 서울 순화동 다산연구소에서 만난 박 이사장은 다산의 사상에서 앞으로의 갈 길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다산이 <경세유표>에서 표방한 ‘신아구방(新我舊邦·나라를 혁신함)’이야말로 한국사회를 개혁하자는 최근의 ‘2013년 체제’ 논의와도 부합합니다. 87년 체제가 우리 사회에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켰지만 많은 부분이 후퇴했습니다. 코페르니쿠스적 개혁이 다시 필요합니다.”
33세의 다산은 암행어사가 돼 경기 북부를 돌아본 뒤 정조에게 보고서를 제출한다. 박 이사장은 피폐한 백성들의 삶을 목도한 뒤 쓴 이 글 속에 우리가 나아갈 방향이 들어있다고 말한다. 바로 ‘이존국법 이중민생(以尊國法 以重民生)’, 즉 “국법을 존엄하게 하고 민생을 무겁게 여겨야 한다”는 말이다. “철저한 법집행은 민생을 어렵게 만들고 민생만 살피면 국법이 무너지기도 합니다. 다산은 정치력의 핵심이 바로 두 가치를 조화시키는 데 있다고 여긴 것이죠.”
경제정책도 마찬가지다. 박 이사장은 다산의 경제정책 핵심을 ‘손부익빈(損富益貧)’이라고 소개했다. “부자의 것을 덜어서 가난한 사람에게 더해야 한다”는 것이고 그 방법은 바로 토지의 국유나 공전(公田) 제도였다. “시장에 모든 것을 맡겨두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비정규직이 900만명에 육박하고 노동착취가 벌어지고 있는데 이에 반대하는 시위를 불법이라고만 하면 안 되죠. 법을 지킬 수 있게끔 해 줘야 법이 법으로 설 수 있습니다. 결국 민생과 국법의 조화가 필요하고 국가의 적절한 개입이 필요한 것이죠.”
역사학자 정인보는 다산의 학문을 ‘민중적 경학’이라고 했다. 일반 백성들이 몸소 실천이 가능한 이론, 학문, 경전해석에 힘썼다는 것이다. 관념보다는 실재를 중시하고 제도개혁과 기술개발을 강조한 것도 그런 맥락이다. 어쩌면 뛰어난 휴머니스트적 기질 때문인지도 모른다. 다산은 죄인에게 고문과 칼 씌우기를 금지하고 병과 굶주림, 혹한과 혹서에 시달리는가를 살폈다. “곧 처형될 죄인이라도 자식이 없다면 부인과 합방의 기회를 주기도 할 정도였습니다.”
다산은 초로의 나이에 유배생활에서 벗어난 뒤 ‘사암(俟菴)’이라는 호를 사용했다. 경전에서 따온 말로, 먼 훗날 성인들이 자신의 학문을 보더라도 잘못됐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다. “당장은 안 쓰이더라도 다음 시대에는 다를 수 있으니 기다린다는 뜻이죠.” 다산은 “매미는 봄과 가을을 알지 못한다”는 <장자>의 말을 역사변혁의 근거로 삼았다. 여름 한철만 아는 매미는 세상의 변화를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봄과 가을, 겨울은 찾아온다는 것이다. 지금은 다산이 바라던 그 시대인가. 필생의 작업으로 <다산 전기>를 집필하려는 박 이사장의 영원한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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