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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모음/누런돼지

도올 “고전 번역, 당대 의미를 오늘의 의미체계에 맞춰야”

황경상 기자 yellowpig@kyunghyang.com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1192114525&code=100203

조선 선조 때 좌의정을 지낸 정탁(1526~1605)은 누명을 쓰고 옥에 갇힌 충무공 이순신을 변호하기 위해 상소문을 쓴 것으로 유명하다. 그를 기리는 신도비명(神道碑銘)의 맨 마지막 부분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수충갈성 분무공신(輸忠竭誠 奮武功臣).’ 이를 번역한 사람은 “충과 정성을 다하여 무를 떨친 공신이라네”라고 옮겼다. 언뜻 보면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우리 고전문헌의 오역 사례 중 하나다.

지난 18일 서울 대학로 동숭아트센터에서 열린 도올 김용옥 원광대 석좌교수(64)의 강연회는 한시 번역의 어려움과 오역 사례를 되짚어 보는 ‘한시 만담(漫談)’으로 꾸며졌다. 정선용 한국고전번역원 수석연구위원이 주제 강연을 맡았다.

정 위원은 신도비명 사례를 들며 “수충갈성 분무공신이라는 부분은 이상하게 앞부분과 운이 맞지 않는다”며 “이것은 시를 지은 사람이 마지막 부분에 자신의 이름을 쓰면서 앞에 붙인 공신호(功臣號·공신들에게 주어진 명칭)인데 이것을 글자 그대로 번역한 것”이라고 말했다. 개국공신 같은 호칭을 시로 번역한 해프닝인 셈이다.

도올 김용옥 교수는 18일 동숭아트센터 강연에서 “고전은 오늘날 젊은이들도 읽을 수 있도록 번역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 김영민 기자 viola@kyunghyang.com

 

“이런 경우가 많은데, 잘못된 게 보이도록 만든 공로도 인정해야 합니다.” 도올 김용옥 교수의 추임새에 청중은 웃음을 쏟아냈다. “초역이라는 것은 정말 어려운 겁니다. 아무리 잘못 번역했어도 잘못했다고 할 필요가 없어요. 점점 잘못된 것이 밝혀지고 출전이 밝혀지고 상황이 밝혀지면 좋은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는 자유로운 토론의 자리입니다.”

김 교수의 말 그대로 강의 도중에 말을 끊고 끼어드는 이들도 여럿이었다. 한 청중은 ‘철종황제 만사’라는 한시에 대해 “조선 철종의 만사(挽詞·죽은 사람을 위해 쓴 글)라면 황제라는 말을 쓸 수가 없는데 어떻게 된 거냐”고 따졌다.

김 교수는 “이치에 맞는 얘기”라며 정 위원에게 청중이 납득할 때까지 재차 설명을 구했다. 이어 “정 위원의 마이크 목소리가 너무 작은 것 같다”며 소리를 높이도록 부탁하는 등 청중을 배려했다.

“저는 여기서 얼마든지 질문해도 좋다고 생각해요.” 김 교수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지적받기를 싫어한다”며 “잘난 척만 하는 도사들만 있는데 한학계를 망치고 있다”고 일갈했다. 그는 자신의 도쿄대 유학 경험을 얘기했다. “도쿄대의 유수한 석학들에게 모르는 것을 물어보면 꼭 내일 조사해서 알려주겠다고 답해요. 내가 모르는 건 모른다고 하는 것이고, 알고 있다 할지라도 학문을 대하는 자세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반면 제가 우리나라 어떤 한학의 대가에게 번역 문제를 지적했더니 평생 인색하게 굴더군요.”

김 교수는 그런 경험을 바탕으로 “책을 낸 뒤에 출판사로 틀린 부분을 지적하는 전화가 오면 감사하게 생각하고 모두 다 판갈이한다”며 “한문 번역은 절대로 완벽한 것이 있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번역은 다른 말과 언어를 우리말로 그대로 옮긴다고 생각해선 안됩니다. 당대의 의미와 이해체계를 오늘날의 의미체계에 상응시키는 작업이 번역인 겁니다. 제발 오늘날 젊은이들이 읽을 수 있도록 번역을 해야 합니다.”

정 위원도 우리나라의 번역 자료 부족을 지적했다. “조선왕조실록을 번역하면서 한탄했어요. 우리가 만든 자료는 참고할 게 없습니다. (일제시대 식민사관을 만들어낸) 조선사편수회 자료를 참고할 수밖에 없었어요. 해방된 지 오래됐는데 우리 학계는 기초자료가 안돼 있습니다.” 김 교수도 “고전 번역의 대가인 성백효 선생도 일본 번역을 높이 평가할 만큼 일본의 고전 번역은 정확하고 배울 점이 많다”고 말했다.

이날 강의는 한국고전번역원이 지난해 말부터 격주 수요일마다 진행하는 ‘2012 도올 선생님과 함께하는 고전의 향연’ 프로그램의 다섯 번째 순서였다. 120명 선착순 무료 입장인 이날 강의는 20~30분 전부터 좌석표가 바닥났다. 좌석 사이사이는 물론이고, 강연자가 앉아 있는 무대 앞과 옆까지 청중으로 들어찼다.

김 교수의 강의는 번역에서 시작했지만 그 근본에는 사람 사이의 소통과 존중이 있다는 가르침으로 끝을 맺었다. “<맹자>에 책을 읽으면서, 그 책을 쓴 그 사람을 모른대서야 말이 되느냐(讀其書, 不知其人, 可乎)는 말이 있습니다. 그 사람을 알아야 합니다. 저도 여러분을, 여러분도 여기 와서 발표하는 우리를 알아 나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