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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년이 지나도...

끊임없는 자기 성찰이 가능한 사람/리영희


12월 5일이면 리영희 선생의 1주기라고 합니다.

시간이 참 빠르네요.
지난해 타계 소식을 듣고 “아 우리 시대 어른이 또 한 명 사라졌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게 벌써 1년 전이라니.


저는 리영희 선생의 책을 많이 읽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리 선생을 잘 안다고 말하기는 매우 부끄럽습니다.
그저 언론사 입사 시험을 준비할 때 제 이상형이자 로망이자 꿈은 ‘리영희’였습니다.

입사 직전 <대화>(2005)를 읽었는데 ‘읽는 이를 위하여’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이 긴 시간에 걸친 나의 삶을 이끌어준 근본이념은 ‘자유(自由)’와 ‘책임(責任)’이었다. 인간은 누구나, 더욱이 진정한 ‘지식인’은 본질적으로 ‘자유인’인 까닭에 자기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그 결정에 대해서 ‘책임’이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존재하는 ‘사회’에 대해서 책임이 있다는 믿음이었다.
-읽는 이를 위하여


*마지막으로 덧붙일 청이 있다. 이제는 거의 지나가버린 그 시대를 인간적 고통과 분노, 상처투성이의 온몸으로 부딪쳐 살아온 기성세대나, 앞 세대들이 심고 가꾼 열매를 권리처럼 여기면서 아무런 생각 없이 맛보고 있는 지금의 행복한 세대의 독자에게 부탁하고 싶다. 이 책을 읽으면서 함께 고민하고 자신이 그 상황에 직면했거나 처했다면 ‘지식인’으로서 어떻게 가치판단을 하고 어떻게 행동했을까를 생각해 보기를. 그럼으로써 이 자서전의 당사자와 대담자가 책 속에서 진행한 것과 같은 자기비판적 대화의 기회로 삼기를. 그리고 기회가 있으면 나와의 비판적 대화도 가질 수 있기를.
-읽는 이를 위하여


 

 

“기회가 있으면 나와의 비판적 대화도 가질 수 있기를”

이 문장을 읽고 얼마나 리 선생을 만나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입사 이후 선생님과 인터뷰를 했다는 선배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정말 부러웠습니다.
“아 나도 한 번 만이라도 만나고 싶다”

간절했는지 저에게도 기회가 생겼습니다.
2009년 7월 인권연대 강연에 오신 것이죠.
수습기자 때 알게 된 인권연대 오창익 국장님께 전화를 걸었습니다. “만나뵐 수 있느냐”고.

오 국장님은 흔쾌히 저녁 먹는 자리에 와서 인사하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신이 잔뜩 났습니다.
집에 책을 두고 와 교보문고에 가서 책을 사고 마음이 급히 택시를 갔던 날이 기억나네요.

식사 자리에 가서 어색하게 인사를 드리고 명함을 내밀었습니다.
“경향신문 기자군요. 열심히 하세요”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좋은 언론사이니 더욱 열심히 취재하라는 말씀을 듣고선 괜히 어깨가 곧게 펴지는 기분이 들기도 했었어요.

그런데 그때도 몸이 많이 안 좋아 보이셨습니다.
그래도 선생님의 표정을 하나라도 더 보고 싶고 말씀 하나라도 더 듣고 싶어서
강연장 가시는 길까지 따라나섰습니다.

강연 장소인 조계사에 도착했을 때 옆에 계시던 분들이 사진이라도 한 장 찍자고 하셨습니다.
저는 속으로 얼마나 기뻤던지. 쑥스러워서 사가지고 갔던 책을 내밀지도 못하고 있었거든요.
그렇게 사진을 찍었습니다.
선생님이 “레이디 퍼스트니까”라면서 가운데에 서라고 해주셔서 영광스럽게 찍은 사진입니다.
(아쉽게도 사인은 결국 못 받았습니다;;)

 




강준만 교수는 <각개약진 공화국>(2008)에서 리영희 선생을 이렇게 평가합니다.

*‘사상적 일관성’보다 중요한 것은 지식인의 자기반성

지난날보다 더 지혜로워져야 한다. 이제 이분법이 잘 통하지 않는다. 상황이 달라지면 지식인은 자기 수정을 해야 한다. 단시일에 바꾸려는 것, 비타협적인 것, 독선, 과격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제는 군부독재 때처럼 무리수를 쓰면서 전면 투쟁하고 그런 과정을 통해 목적을 달성하고 정치적으로 성장하는 시대가 아니다.

2005년 봄에 나온 리영희의 발언이다. 지식사회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리영희는 ‘사상의 은사’라기보다는 ‘성찰의 대부’다. 그가 1991년 1월26일에 행한 ‘사회주의의 실패를 보는 한 지식인의 고민과 갈등’이라는 강연은 ‘성찰의 역사’에서 대사건이라 부를 만했다. 수많은 좌파 지식인, 청년들이 리영희에게 실망을 표시했고 일부는 리영희를 비판, 비난했다.

리영희 스스로 밝혔듯이, “그 당시 『전환시대의 논리』를 관철하는 나의 입장은 마르크스주의나 레닌, 스탈린주의이기보다는 휴머니즘이었”지만, 그의 사상의 제자들은 ‘휴머니즘’을 넘어섰다. 그런 제자들의 비판, 비난에 대해 리영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섣부른 우상이 되고자 했거나, 우상처럼 행세했거나, 그런 것은 전혀 없었어요. 다만 일정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그렇게 받아짐으로 말미암아서 후배나 후학들의 시야를 가리게 했다면, 법률용어로 말하면, 미필적 고의라고나 할까요. 내가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가져오게 한 것에 대해 한 선배 지식인으로서 가슴 아픈 자책이라고 할 수도 있고, 반성이라고 할 수 있고, 미안하다고 할까, 이런 것을 다 합친 감정에 사로잡혀 있어요. 그건 사실이에요. 그런데 나는 지금 거대한 역사적 변혁 앞에서 지적, 사상적 그리고 인간적 겸허의 무게에 짓눌려 있는 심경입니다. 그와 동시에, 주관적 오류나 지적 한계가 객관적 검증으로 밝혀질 때, 부정된 부분을 ‘사상적 일관성’이라는 허위의식으로 고수할 생각은 없습니다. 더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합니다. 지난 1년간 글을 발표하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지요.”

리영희는 자신의 ‘지적 고민’을 속으로만 하고 잠자코 있어도 될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게 바로 리영희다.


 

사실 제가 리 선생께 제일 감동받았고 닮고 싶은 부분도 이런 평가입니다.

“자기반성, 자기 성찰”

사소한 자기의 잘못도 “잘못이었다”고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리 선생은 자신의 신념이자 여러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쳤던 ‘생각’을 수정합니다.

젊은 시절 자신의 신념을 저버리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척 살아가는 사람이 이렇게도 많은 사회에
리 선생은 ‘사상의 일관성’이라는 허위의식으로 고수할 생각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유연함은 어디에서부터 나오는 걸까요?

거기에 리 선생은 “더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절실합니다”라고 말합니다.

리 선생은 <대화>에서도 이렇게 말합니다.

*90년대 후반부터 나는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한 내적 갈등이 심해지고 실의와 방황을 겪었어요. 또 변화한 정세 속에서 나의 위치설정이 잘 안 되더구만. 그래서 뭘 쓸 생각을 못했어요. 『역정』이 나간 198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이 나라와 사회에서 일정한 선구적 역할을 해온 것이 사실이에요. 하지만 광주민주항쟁 뒤에는 우리 대중의 의식이 급진전했고, 국민생활과 민족문제의 국가적 위기, 사회적 부조리 전반에 대한 지식인·청년·대학생·노동자들의 문제의식과 인식능력의 수준이 나를 뛰어넘은 감이 있을 만큼 발전했어요. 60~80년대에 걸친 나의 글과 책과 말 그리고 나의 행동으로 계몽되고 ‘의식화’된 후배와 후학들의 역량이 놀라울 만큼 커졌어요. 내가 할 역할은 다 했고, 남은 역할은 내가 변치 않고 그 자리에 그 모습으로 있어주는 것뿐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이 나라, 사회의 변화와 전진을 지켜보면서, 혹시 요구가 있으면 몇 마디를 해주는 것으로 족하지. “족한 줄을 알면 위태롭지 않다”는 성현의 가르침은 지금 바로 나에게 한 말이라고 생각하게 됐어요.


끊임없이 자기 생각을 수정하고 자기 자신을 반성하는 사람.
“족한 줄을 알면 위태롭지 않다”는 말을 가슴 속에 담고 그를 실천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된다는 건 어떤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