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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년이 지나도...

“없는 사람 얼굴 가져다가 있는 사람 위해서 쓰지 마요”

“없는 사람 얼굴 가져다가 있는 사람 위해서 쓰지 마요”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10·26 재보선이 끝났습니다.
박원순 신임 서울시장이 지하철을 타고 출근하고 노량진 수산시장에 가고 저녁에도 민생 행보를 이어간다고 하네요.
정말 그동안 시장들과는 다른 모습으로 하루를 시작했네요. 기대가 많이 됩니다.


맨 위에 쓴 문장은 제가 취재하면서 들었던 가장 잊지 못하는 말입니다.
2009년 여름이었을까요. 저는 서울시를 출입했었습니다.
당시 기업형슈퍼마켓(SSM) 문제를 기획 기사로 다뤄보자는 데스크 지시로 서울 강북 가게들을 취재하러 갔습니다.

비가 오는 날이었는데 여러 가게들을 돌아봐야 하는 일이라 가기 전에는 짜증도 났었던 기억이 나네요.
철퍽철퍽 길을 걸어 한 가게에 들어갔습니다. 기자라고 소개하니 주인 아주머니는 약간 냉담한 표정으로 “왜 왔느냐”라고 물었습니다.
아주머니가 냉담하게 묻자 저도 조심스러워져 “저기 길 너머 SSM이 생겼던데 가게 운영이 힘드시지 않은가...해서...”라고 말끝을 흐렸습니다.

아주머니는 그제서야 얼마나 매출이 떨어졌는지 말씀하기 시작했습니다.
손님들이 더 싼 것을 찾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런데 꼭 우리같은 영세업자들의 밥그릇까지 대기업이 가져가야 하는 거냐, 나는 옷가게를 하다가 가게 옆에 대형마트가 생겨서 망하고 그 다음엔 빵집을 했는데 또 파리바게트가 옆에 생겨서 망하고 3년 전에 이 가게를 시작했다, 그런데 이제 또 업종을 바꿔야 하느냐, 우리 아들이 대학교 2학년인데 가끔 저 대기업들에 내 아들이 취직은 할 수 있는 걸까 그런 생각까지 든다... 답답하고 답답하다...

줄줄이 말을 듣는데 점점 더 할 말이 없어졌습니다. 기자로서 제가 할 수 있는 말이란 그저
“그러게요... 어떻게 이런 곳까지 SSM이 들어올까요” 정도였습니다.

취재를 마치고 돌아서려는데 아주머니가 말씀하셨습니다.

“없는 사람 얼굴 가져다가 있는 사람 위해서 쓰지 마요”

갑자기 목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 아주머니의 말씀을 들은 이후로
“없는 사람 얼굴 가져다가 있는 사람들을 위해 쓰는 사람”을 보면 울컥 화가 납니다.

저 또한 얼마나 “없는 사람 얼굴 가져다가 있는 사람을 위해서 쓰지 않기 위해” 노력했는지도 되돌아 봐야겠죠.

그래서 이번 선거 과정에서 유독 화가 많이 났습니다.
고가의 피부과를 다니면서 피부 관리를 받는 사람과 하도 구두를 오래 신어서 헌 구두가 화제가 되는 사람.
과연 어떤 사람이 “없는 사람 얼굴을 가져다가 있는 사람을 위해 쓰는 사람”일까요?
어느 트위터 이용자의 말처럼 ‘시궁창’이 ‘수돗물’에게 네거티브를 퍼붓는 것을 보면서 절망스럽기까지 했습니다.

 

제가 디지털뉴스팀으로 오기 직전 사회부에서 종로경찰서를 출입했습니다.
종로서 근처에는 참여연대, 아름다운재단, 희망제작소가 있어서 그 세 단체도 제 출입처였습니다.
모두 박원순 신임시장이 만들고 가꾼 단체들이지요.
 
안철수 서울대 융합기술대학원장이 박원순 신임 시장과 단일화 선언을 한 이후 캠프가 본격적으로 꾸려지기 전
제가 박원순 당시 예비후보를 이틀 정도 취재했었습니다.

9월 8일이었던가요.
상임이사로 재직하고 있던 아름다운재단, 아름다운가게, 희망제작소에 사직을 하던 날이었습니다.



헌 구두가 인터넷에서 화제가 된 뒤였고 박 시장은 “오늘은 새 구두 신었다”며 웃었습니다.
뒤축이 닳을 때까지 구두를 신는 사람.
그리고 그 사람은 헌 옷 등 다 쓴 물건을 교환하는 가게, ‘아름다운가게’를 만들었습니다.

그 아름다운가게에 인사를 와서 “저는 괜찮은데…선물로 주신 구두이니 잘 신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일부 보수 언론은 강남의 월세 아파트를 사는 박 시장이 ‘서민’이냐고 묻습니다.
그러나 서민이라는 존재가 과연 뭘까요?
저는 소득계층을 따져 서민이냐 아니냐를 묻기 이전에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이 어디를 바라보고 살아왔는지 말입니다.

사법고시를 패스하고도 인권변호사의 길에 들어선 사람, 참여연대를 만들어 꾸준히 권력감시운동을 펼친 사람, 우리나라의 기부문화를 바꿔보겠다며 시작한 아름다운재단 활동, 헌 것을 나눠쓰며 소비문화를 바꿔보려고 노력한 아름다운가게, 그리고 시민들이 직접 아이디어를 모아 세상을 바꾸자는 희망제작소 활동...

취재하면서 아름다운재단 관계자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2006년 박원순 시장(변호사)은 필리핀 막사이사이상의 공공봉사 부문을 수상했습니다.

당시 상금이 5000여만원이었는데 박 시장은 아름다운재단에 전화를 걸었답니다.
“도저히 가지고 올 수 없어 두고 오겠다”며.

항상 기금을 모으느라 고생하는 아름다운재단 관계자가 “재단도 돈이 없으니까 반만 두고 와주세요”라고 부탁했는데도 박 시장은 결국 다 두고 왔다고 합니다.


박원순 신임 서울시장을 응원합니다.
그가 부디 지금까지 살아온 것처럼 “없는 사람 얼굴 가져다가 있는 사람 위해서 쓰지 않는” 시정을 펼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