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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년이 지나도...

찌질한 공시생 ‘영욱’이 선생님 ‘하선’과 맺어질 수 없는 이유


찌질한 공무원 시험 준비생은 아름다운 선생님과 맺어질 수 없는 걸까요.

안녕하세요. ‘누런돼지 관리자’ 임아영입니다.
요즘 ‘누런돼지’와 MBC의 <하이킥-짧은 다리의 역습>을 보고 있습니다.
가장 비호감인 캐릭터는 ‘고영욱’이었는데요.

MBC 홈페이지에서

장조림 한 조각에도 눈물 흘리는 노량진 붙박이 고시생 고영욱

노량진 고시원에서 몇 년째 9급 공무원 시험 준비 중인 고시생. 가난한데 식탐이 있어 소고기 장조림 하나에도 목숨을 건다. 원칙주의자에 융통성도 부족해 뭐든 미련하게 한 우물만 파는 스타일. 천사같은 하선에게 반한 뒤 사랑에서도 미련하게 한 우물만 판다.


홈페이지에 나와 있는 고영욱 캐릭터 설명입니다.

소심하나 아름다운 국어 선생님 박하선을 짝사랑하는 고영욱이 나올 때마다 괜히 주는 것도 없이 얄미워 그 캐릭터를 안 좋아했습니다.;;ㅎㅎ 게다가 잘생긴데다 하선을 몹시도 좋아하는 체육 선생님 서지석이 마음 앓이를 할 때마다 고영욱 캐릭터가 더 싫어졌죠. 하선과 지석이 맺어지기 바라는 마음 때문이었을까요.

몽유병이 있던 고시원 이웃주민(?)인 백진희가 소고기 장조림을 먹었다고 고래고래 화를 내는 모습도 좀스러워 보였고 우연히 하선의 ‘생명의 은인’이 되어 사귀게 된 과정도 탐탁치 않았습니다. 하선을 더 좋아하는 지석이 있는데 어디 감히!


 

그런데 드디어 영욱과 하선이 헤어졌습니다. 그것도 영욱이 먼저 하선에게 이별을 선언하는 방식이었습니다.

23일 방송된 <하이킥>에서 영욱은 시험 발표가 난 뒤 하선 앞에 멋진 차를 끌고 나타났습니다.
하선은 영욱이 시험에 합격한 걸 기뻐하며 넥타이도 사주고 둘은 행복한 시간을 보냅니다.

그러나 헤어지던 순간 영욱은 “멀리 지방으로 발령받을 것 같은데 혹시 하선씨, 나와 함께 가줄 수 있냐”고 묻습니다. 지방직 공무원에 합격했다는 것이었죠.

당황한 하선은 “저는 학교도 여기 있고 지원이도 있고...”라며 거절 의사를 보입니다.
영욱은 “기적이 일어날까 해서 한 번 물어본 것”이라면서 “짧은 시간이었지만 하선씨 만난 후로 너무 행복했다. 그동안 나 같은 놈 만나주신 것 정말 감사하다. 잘돼서 헤어지는 건데 웃으면서 헤어지자”며 이별을 고하죠.

영욱은 또 시험에 떨어졌던 겁니다. 영욱은 마지막으로 하선을 한 번 안아본 후 “다 미안하다. 다 고맙다”고 말하고 뒤돌아섭니다. 하선은 영욱의 제안을 거절하면서 영욱에 대한 자신의 마음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보여주죠.

고시원에 돌아온 영욱을 맞은 건 작디작은 방이었습니다. 영욱은 그 작은 방에서 하선과의 추억을 되새기며 소리내어 흐느낍니다. 그때 옆방에서 조용히 하라는 ‘노크’ 소리가 들리죠. 그동안 노크 소리에 주눅들어 살던 영욱도 이번에는 울음소리를 죽일 수가 없는지 엉엉 울었습니다.

MBC 화면 캡처

23일 방송분이 끝나고 나서 갑자기 멍해졌습니다.
영욱이 안돼 보여서였을까요?

영욱이라는 캐릭터가 공시생에게는 연애도 허락되지 않는 사회,를 보여주는 것 같았습니다.

예전 TV 드라마에서 사법고시를 공부하는 남자 주인공에게 헌신적인 여자 주인공 스토리가 반복됐었던 적이 있었죠. 사시를 합격한 남주(인공)는 결국 여주(인공)를 버리고 여주가 복수하는 이야기.

그런데 김병욱 감독은 ‘공시생’을 이야기합니다.
사시도, 행시도 아닌 공시. 그것도 9급 공무원 준비생.

‘여자 버전’ 88만원 세대를 보여주는 캐릭터 백진희의 상황도 비슷합니다.
진희는 고시원에 살다가 방값을 못 내 쫓겨나고 학자금 대출은 산더미같이 쌓여있으나 계속 취직이 안 됩니다. 결국 보건소 행정 인턴으로 취직했으나 월급은 쥐꼬리인데 고용 안정성도 불투명하죠.

어느날 진희도 결혼한다는 친구 얘기를 들으며 ‘취집’을 상상합니다.
보건소 의사 선생님인 윤계상과 결혼하는 상상이었는데요.
아마 진희의 바람도 이뤄지기 힘들 것입니다.

전작 <거침없이 하이킥>과 <지붕뚫고 하이킥>에서 보여준 김병욱 감독의 비관주의는
쉽사리 가라앉지 않을 테니까요.

영욱이 하선과 헤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앞으로 진희가 계상 때문에 어떤 눈물을 흘리게 될까 걱정이 됐습니다. 공시생으로, 88만원 세대의 백조로 찌질해지기만 하는 20대들에게 어떤 희망이 있을 수 있을까요.
취업 여부가 ‘계급’을 가르는 사회가 되어 버렸는데.
연애·결혼·출산, 기본 중의 기본을 꿈꿀 수 없는 사회.

김병욱 감독은 그 모습을 처절하게 보여줍니다.

찌질하게 장조림에 목을 매는 것이 영욱의 잘못은 아닙니다.
하선에게 영욱은 늘 진심이었을 겁니다.
그렇지만 하선이 영욱을 좋아하지 않을 수는 있겠죠. 사람이 사람이 좋아지는 건 사람 힘으로 되는 게 아니니까요. 하선은 영욱이 공시생이라는 이유로 부끄러워하지도 않았습니다. 좋은 사람이죠.

그런데 왜 저는 영욱을 안 좋아했을까요.
혹시 ‘찌질해서’였을까요.
그 생각이 다다르자 맨얼굴을 들킨 것처럼 부끄러웠습니다.

3년 전 제가 미취업자이던 시절 저는 스스로가 부끄러웠습니다.
취직을 못한 것이 온전히 내 잘못만도 아니거늘 자신도 없었고 사람 만나는 것도 내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스스로를 긍정하는데까지 시간이 꽤 걸렸습니다.
“내 잘못이 아니다, 그 어떤 것도 온전히 내 탓은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데까지요.

그때 제 모습도 혹시 ‘찌질’했을까요.
영욱을 바라보던 시선에 그때 제가 겹쳤습니다.


공시생이 선생님을 만날 수 없는 사회,
이제 더이상 사시, 행시를 봐서 합격하는 ‘신분상승’의 사회가 아니라
9급 공무원이 되는 게 ‘생존’이 되는 세상.

우리는 그런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MBC 화면 캡처

제가 좋아하는 <지붕뚫고 하이킥>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실은 가기 전에 아저씨 꼭 보고싶었는데, 이뤄져서 너무 좋아요.

(이민 갈 이유 안 갈 이유가 반반이었다고 그랬지? 가기로 결심한 이유는 뭐야? 아빠랑 셋이 사는 거?)

네. 그리고 신애한테 그게 더 좋을 것 같아서.

(신애?)

언젠가부터 신애가 자꾸 저처럼 쪼그라드는 것 같아서요. 식탐 많던 애가 먹을 거 눈치를 보고 아파도 병원갈 돈이 없을 까봐 걱정하고. 그게 마음이 아팠어요. 그래서 가난해도 신애가 자유롭게 뛰어놀 수 있는 곳으로 가고 싶었어요.

(안 가고 싶었던 이유는)

검정고시 꼭 보고싶었어요. 그래서 대학도 가고. 아저씨 말대로 신분의 사다리를 한칸이라도 올라가고 싶었어요. 근데 언젠가 또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그 사다리를 죽기살기로 올라가면 또다른 누군가가 그 밑에 있겠구나. 결국 못 올라간 사람의 변명이지만.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가기 싫었던 이유는 아저씨였어요. 아저씨를 좋아했거든요. 너무 많이. 처음이었어요 그런 감정.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설레고, 밥을 해도, 빨래를 해도, 걸레질을 해도. 그러다 문득 제 자신을 돌아보게 됐고, 부끄럽고 비참했어요.

(미안하다. 내가 한 말들 때문에. 상처주려고 한 게 아니었는데)

아니에요. 다 지난 일이고 전 괜찮아요. 그동안 제가 좀 컸어요.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의 끝이 꼭 그 사람과 이루어지지 않아도 좋다는 거 이제 깨달았고. 그래도 떠나기로 하고 좀 힘이 들긴..들었어요. 아저씨랑 막상 헤어지면 보고싶어서 못 견딜 것 같아서.

그래도 마지막엔 이런 순간이 오네요. 아저씨한테 그동안 마음에 담아놓은 말들 꼭 한번 마음껏 하고 싶었는데. 이뤄져서 행복해요. 앞으로 어떤 시간들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지만, 매일 지금 이순간처럼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다 와 가나요?

(어)

아쉽네요. 잠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어요.

(뭐?)

시간이, 잠시 멈췄으면 좋겠어요.


 

동생이 ‘쪼그라드는’ 걸 보기 힘들었던 언니 세경이 신분의 사다리를 고민하지 않는 사회로 떠나려는 찰나
세경은 죽음으로써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이룹니다.
지훈을 좋아했던 세경은 이렇게 꿈을 이루는 걸까요.

저는 죽지 않고 살아서 우리들의 소망을 이루면 좋겠습니다.

영욱이 공무원 시험에 붙지 않아도 행복해지는 사회, 스스로가 ‘찌질하다’고 느끼지 않는 그런 사회.
그런 세상을 만들어야겠죠.

이제 왠지 하선과 지석의 사랑이 이뤄지는 모습을 보는 게 재미없어질 거 같습니다.
영욱이 생각나서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