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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년이 지나도...

세종은 오로지 백성 사랑뿐이었을까

안녕하세요. 경향신문 문화부 황경상 기자입니다.

신복룡 교수님의 책 <한국정치사상사>를 소개한 기사(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11251929495&code=900308)가 메인에 걸리면서 항의 메일과 적잖은 오해의 댓글이 달린 것 같아 몇 글자 적어보려 합니다.

우선 말씀드릴 것은 '세종이 백성을 사랑하지 않았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다만 그런 이유 때문에 한글을 창제한 것은 아니다'에 방점이 찍혀야 한다는 것입니다. 분량상 교수님의 말씀을 줄이면서 그 부분이 충분히 반영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만, 인터뷰 당시 선생님 말씀 원문을 전달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세종에 대해 아무런 비판의 여지도 없이 백성을 사랑해서 한글을 만들었다고 얘기하지만, 정치학을 공부하는 입장에서 가장 안타까운 것은 그런 국문학적 해석으로부터 조금도 나가지 않는 것입니다. 한글이 아니었더라도 세종은 성군이었을 것입니다. 다만 지난해 저의 한국학중앙연구원 강연 제목이 '백성을 바라보는 세종(世宗)의 시선-그것은 오로지 사랑뿐이었을까?'이기도 했는데, 과연 오로지 사랑 뿐이었을까 하는 점입니다. 한글 창제에는 백성에 대한 연민도 분명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진심은 어떻게 하면 다스리기에 편할까 그것을 고민한 것입니다. 대명률도 한문이고, 통치의 칙어나 소가 모두 한문이었는데, 백성과 군주 사이의 소통이 참 어렵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한글은 통치를 수월하게 하고, 백성들과 소통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만든 것입니다. 후세의 사학자들은 사랑만이 이유라고 하는데, 사랑뿐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세종은 정치적 인간형이었습니다."



선생님의 책을 통해 좀 더 자세하게 풀어보겠습니다.
세종이 백성에 대한 애정으로 한글을 창제했다는 것은 훈민정음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나랏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와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우매한 백성들은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 이를 딱하게 여기어 새로 28자를 만들었으니 사람들로 하여금 쉬 역혀 날마다 쓰는데 편하게 할 뿐이다."



그러나 신 교수님은 세종의 진의가 다음의 글에 더 잘 나타나 있다고 봅니다.

"우리나라는 예악과 문물이 중국에 비길 만하되, 다만 우리말이 중국과 달라 한문을 배우는 이는 그 뜻을 깨치기 어려움이 고민이었고, 옥사(크고 중대한 범죄를 다루는 일)를 다스리는 이는 그 곡절을 알기 어려움이 병폐였다."



물론 일차적인 동기가 백성에 대한 사랑이었을 수 있지만, 이 시기는 "옥사를 다스리는 이가 그 곡절을 알기 어려울" 만큼 왕조와 기층 백성들을 연결해 주는 소통의 도구가 필요했다는 것입니다. 새로 문을 연 왕조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면서 생긴 시대적 요구였습니다. 즉, 백성들을 가르쳐서 더 효률적인 통치를 일궈내야 했다는 것입니다.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는 세종은 '훈민'을 할 방법을 찾고 있었습니다.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문자의 발명'이었다는 것이지요.

세종은 이를 통해서 '용비어천가'를 만들어 왕실의 정통성을 홍보하고, 유교적 질서를 백성들에게 가르치게 됩니다. 또 <대명률> 등을 한글로 번역하라고 지시하는 등 백성들에게 법을 쉽게 이해하도록 만들어 통치를 수월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실록을 보면 세종은 "무릇 사람이 죄에 빠지는 것은 그 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에 나오는 '부민고소금지법' 논쟁 또한 비슷한 맥락입니다. "아랫사람(백성)은 윗사람(수령)을 고소할 수 없다"는 이 법은 관료들이 자신들의 지배를 확고하게 하기 위해 만들었습니다. 세종은 "백성과 수령은 비록 대소의 분별은 있을 망정 군신의 의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라며 "백성의 피해를 고소하지 못한다면 실로 억울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결국 백성들이 법을 잘 이해하고 잘 지키는 한편, 이를 통해 잘못된 관리들을 견제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신 교수님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세종의 한글 창제는 아무리 칭송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의 한글 창제 업적은 애민이라는 측면에서 강조하려는 것이 역사학이나 문화사의 일관된 입장이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정치사적 입장은 다를 수 있다. 즉 그의 한글 창제에 애민의 요소를 부인할 수는 없지만, 그보다 그의 진정한 의도는 백성을 가르침으로서 통치를 편의롭게 하는 데 집중돼 있었다. 그는 문자 혁명을 통하여 왕실의 존엄성과 유교 질서를 가르침으로써 건국 초기의 국정을 장악하고자 했다. (...) 창업 26년만에 오른 그는 국초의 어려움을 극복해야 할 수성의 군주로서 국가의 기반을 구축하고 민심을 추슬러야 할 책무를 절감했고, 그러한 과업을 위해 백성을 가르치고 설득할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러한 과업을 위한 한 방법이 한글 창제와 그를 통하여 백성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물론 신 교수님은 세종이 "백성을 먹여 살리는 것이 군주의 으뜸 가는 덕목이라고 생각하고, 노비와 죄수의 사회적 처우에 대해 깊은 연민을 가지고 있었다"는 등의 업적도 빼놓지 않습니다.

신 교수님의 이러한 주장은 그렇게 충격적인 말씀은 아닙니다. 요즘 TV드라마에 나오는 세종의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지요. 욕도 하고 화도 내면서 어떻게 하면 자신이 그리는 이상적인 통치를 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그런 모습이 실제 인간으로서의 세종의 모습에 가깝지 않은가 싶습니다. 만원짜리에 나오는 세종처럼 신격화된 모습으로는 오늘날 우리에게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겠지만 그런 모습의 좌충우돌하는 '인간' 세종에게서는 오히려 배울 점이 많을 것입니다. 오히려 지나치게 신격화해서 아무런 비판도 재해석도 가하지 못하게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세종이 원하는 바는 아니었겠지요.

비록 드라마 속이지만 '뿌리깊은나무'에서 세종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식견이 얄팍하다는 이유로,  신분이 미천하다는 이유로, 나라 기강이 문란해진다는 이유로, 이런저런 이유로!! 백성들의 입을 막는다면 과인은 대체 어디서 백성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단 말이오."

신 교수님은 예전에도 세종의 공적을 높이기 위해 최만리를 지나치게 깎아내리는 일을 경계한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2001년에 동아일보에 연재하셨던 글인데, 관심 있으신 분들은 읽어보십시오.


[신복룡 교수의 한국사 새로보기4]최만리는 ‘역사의 죄인’인가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0&aid=0000059861

"세종대왕은 훌륭한 분이었고 그를 기리는 것은 합당한 일이다. 그러나 어떤 역사적 인물의 공적을 높이기 위해 다른 인물을 상대적으로 비하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최만리를 헐뜯는다고 해서 세종대왕의 공적이 높아지는 것도 아니고, 최만리가 한글 창제를 찬성했다고 해서 세종대왕의 공적이 낮아지는 것은 더욱 아닐 것이다."


여기에 제기된 반론들도 함께 읽어보세요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20&aid=00000823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