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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년이 지나도...

그 분들을 기억하라

'삼성 X파일'에 등장하는 '떡값 검사'들의 실명을 공개한 혐의로 기소됐던 노회찬 의원이 결국 징역형을 선고받고 의원직을 상실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씁쓸했다. 국회에서 언론사 기자들에게 뿌린 건 괜찮고 인터넷에 올리는 건 안된다는 해괴한 법논리도 기가 막혔지만 무엇보다 소식을 들으며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언론사 입사 시험 공부를 할 때 줄창 읽었던 이봉수 선생님의 칼럼이었다. 2006년에 쓴 칼럼이지만, 마치 현재를 두고 말한 것 같아 섬뜩한 느낌이 들 정도다. 

http://www.hani.co.kr/kisa/section-008003000/2006/01/008003000200601031819608.html

삼성왕국의 정난공신들

단종 원년, ‘나라가 처한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 공이 있다’ 하여 수양대군과 한명회 등 43인에게 내려진 훈호가 정난(靖難)공신이다. 1981년 백령도의 산꼭대기 레이더기지에서 해군 소위로 복무하던 필자에게도 난데없이 ‘국난극복기장’이라는 것이 수여됐다. 쿠데타 세력이 전 국군장병에게 수여한 기장이었다. 두 이벤트의 공통점은 국난이 그들의 범죄에서 비롯됐는데도, 저항세력을 평정해 자신들의 불안을 해소한 것을 ‘국난 극복’으로 미화했다는 점이다.

처음 ‘엑스파일’ 일부가 폭로됐을 때, ‘또 공신을 만드는가’라는 제목으로 전망(8월10일)을 한 적은 있지만, 이토록 깔끔하게 삼성과 <중앙일보> 사주들이 원하는 대로 사태가 수습될 줄이야. 검찰은 기소는커녕 수사조차 제대로 하지 않고 면죄부를 줬고, 언론이 ‘줄기세포’ 사건에만 현미경을 들이대는 동안 ‘엑스파일’은 국민들 관심 밖으로 멀어졌다. 삼성 구조조정본부의 이학수 부회장과 재무·법무·홍보팀 관계자들은 ‘난국 극복’의 공신들이다.

그러나 가신들의 공훈은 국민으로부터 권한과 책임을 넘겨받은 공무원들의 ‘배임 행위’보다는 크지 않다. 가신들이 ‘4등공신’이라면, 검찰 지휘부와 수사진은 ‘3등공신’의 반열에 오를 수 있으리라. 핵심 피의자를 소환도 출국금지도 하지 않고, 서면조사를 하면서도 진술내용을 그대로 인정했다. 반면 제보자와 보도기자들은 모두 기소해 재갈을 물리는 효과를 거뒀다. 논공행상의 일부일까? 중앙일보는 수사 책임자 황교안 차장검사를 ‘2005 새뚝이’로 선정했다. ‘새뚝이는 놀이판의 막을 내리고 새 막의 시작을 알리는 사람’으로, 희망을 상징한다나.

수사 가이드라인을 내리는 듯한 발언을 여러 번 한 노무현 대통령과 정치인들은 ‘2등공신’이 되기에 손색이 없다. 노 대통령과 이학수 부회장, 이종왕 법무실 사장, 정상명 검찰총장은 매우 각별한 사이지만, 친분이 사건 처리에 개입되지 않기를 바랐던 국민의 소망은 역시 망상이었나. 이건희 회장의 국감 증인 채택에 대해서는 수많은 의원들이 방패막이를 자임했는데, 특히 김종률, 이혜훈, 이한구 의원의 활약이 돋보였다. “국회의원이 뭘 안다고, 기업총수를 불러다 놓고 질문하겠다는 거냐”고 일갈했던 이한구 의원은 “검찰이 시원찮다고 생각되면 국회에서 특검을 할 수 있다”고 말한 적도 있으니, 이제 특검에 앞장서기 바란다.

‘1등공신’은 언론이다. 경제·정치권력의 일탈을 감시해야 할 언론이 오히려 진상을 덮는데 급급했다. 중앙일보는 테이프 공개의 불법성만을 부각시키면서 ‘입 열면 안 다칠 언론사 없다’며 공범의식을 강조했다. 다수 신문들, 특히 경제신문들은 소수 의원들의 삼성 관련 질의를 ‘삼성 때리기’ ‘반기업 신드롬’ 등으로 매도하면서 ‘삼성 구하기’에 발벗고 나섰다. 삼성의 업적을 과장하거나 ‘이건희 회장의 가치가 11조원’이라는 등의 ‘이상한’ 기사들이 쏟아진 것도 이때였다. 이 회장이 거둬들인 큰 수확은 ‘한국경제의 견인차가 탄압받고 있다’고 느끼는 대중정서의 확산이다.

‘엑스파일’의 대화 내용은 언론을 낀 거대자본이 경제를 넘어 정치·사회환경을 입맛대로 바꾸려 하고 있음을 드러냈다. 사후처리 과정에서도 돈의 위력만 입증한 채 마무리되면 민주주의에 대한 심각한 도전은 되풀이될 것이다. 행여 또 들통나더라도 “돈 맡겨놓았을 뿐 그렇게 쓸 줄 몰랐다”고 진술하면 검찰이 인정하고 넘어갈 테니까. 삼성경제연구소는 올해를 ‘한국경제 부흥의 원년으로 삼자’고 제창했지만, 아마도 ‘삼성왕국의 원년’이 될 듯하다.

이봉수/영국 런던대 박사과정·경제저널리즘

삼성X파일 사건에서 삼성의 돈을 받았다는 사람도, 줬다는 사람도 모두 무혐의로 처리한 '새뚝이' 황교안씨는 법무부장관에 내정됐다. 삼성 이건희 회장의 국감 증인 채택을 극렬히 거부한 이한구 의원은 경제부총리에 거론되고 있고, 친박계의 핵심으로 불리는 이혜훈 의원도 박근혜 정부 출범을 앞두고 승승장구하고 있다. 이런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확실히 시계는 거꾸로 돌아가는 것 같다. 문제는 아무리 이상한 일을 밥 먹듯이 해내는 '그 분'들이라 할 지라도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면 계속해서 우리 앞에 돌아온다는 것이다. 외환위기 당시 재정경제원 차관이었던 강만수씨가 다시 한 번 MB정부에서 화려하게 복귀한 것을 봐도...

어떤 사건이 터지고 점점 시간이 지나가면, 우리는 그 사건을 추상적인 어떤 '사건'으로만 기억한다. 하지만 그 사건은 다름아닌 '사람'이 한 일이다. 일이 아니라 사람을 기억해야 한다. '그 사람'을 기억하지 못하면 '그 사람'들이 어떤 때는 개혁과 혁명의 기수인 양 우리앞에 '짠'하고 나타난다. 기막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