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6년이 지나도...

‘이근안’되지 않기


안녕하세요. ‘누런돼지 관리자’ 임아영입니다.

좋은 사람은 일찍 떠나는 법일까요. 4일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의 영결식이 엄수됐습니다.
마석모란공원에 잠들게 되었다는 글을 보면서 문득 아득해졌습니다.

김근태의 삶을 말하는 것조차 미안한 사람들과 그에게 빚을 진 사람이 많아서일까요.
저는 김근태 고문이라도 오래 살기를 바랬습니다.
지난 몇년간 우리는 너무 많은 ‘어른’들을 잃어버렸으니까요.
그가 ‘뉴라이트’의 상징에 졌을 때도 이렇게 아득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다시 그가 우리 앞에서 그의 삶을 보여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까요.

                                                                            사진공동취재단

딸 병민씨가 라디오 프로그램에 나와 말했습니다.
“김근태 딸로 태어난 것이 정말 자랑스럽다고 생각했다”
“많은 분들께는 민주주의자 김근태로 기억되길 바라고 저는 저에게 원하는 일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세상을 선물해준 가장 저의 사랑하는 아버지로 기억하고 싶다

박래군 인권재단 사람 상임이사는 페이스북에서 김근태 상임고문의 생전 말을 이렇게 전했습니다.
“희망을 의심할 줄 아는 진지함, 희망의 근거를 찾아내려는 성실함, 대안이 없음을 고백하는 용기, 추상적인 도덕이 아닌 현실적 차선을 선택해가는 긴장 속에서 우리는 다시 희망을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1995)

 

빅터 프랭클이라는 사람을 아시나요?
제가 매우 좋아하고 존경하는 사람 중 한 명입니다.

http://blog.naver.com/mercury117?Redirect=Log&logNo=140118088539&jumpingVid=F7D930914A03667D75181A265049A9875042
빅터 프랭클에 대해 만든 EBS의 <e지식채널> 영상입니다.
(EBS에서는 다시보기를 지원하지 않는듯합니다. 그래서 이 링크를 걸어둡니다)


빅터 프랭클은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 유대인입니다.
신경정신과 의사였던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아내, 형제들과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끌려갑니다.

그는 아우슈비츠에서 끌려오자마자 책으로 내려 했던 원고를 독일군에 빼앗기고 낙담합니다.
언제 가스실로 끌려가 죽게 될지 모르는 공포가 그를 엄습했을 겁니다.
그때 빅터 프랭클은 죄수복 속의 작은 쪽지를 발견합니다.
“진심으로 네 영혼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

빅터 프랭클은 그때부터 하나님이 주신 삶의 목적을 찾아야겠다고 결심하고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합니다.
하루에 한 컵씩 배급되는 물을 반만 먹고
나머지는 세수하는데 쓰고 유리조각으로 면도까지 했다고 합니다.
건강하고 깨끗해 보이면 가스실로 가는 시간이 미뤄질 것을 알았던 것이죠.
결국 그는 끝까지 살아남아 아우슈비츠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때의 기억을 세상에 폭로하고 그 기억을 토대로 ‘로고테라피’(의미치료)를 만들어냅니다.
어떤 두려운 상황, 죽음이 엄습하는 상황에서도 긍정적 마음가짐을 가지며 삶의 ‘의미’를 찾는 태도.
로고테라피는 ‘의미’를 찾는 훈련을 통해 삶에 대한 긍정적 태도를 유지하도록 하는 치료라고 합니다.

그냥 포기하고 죽음을 기다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빅터 프랭클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아우슈비츠의 상황을 기억하고 또 기억하죠.
그리고 ‘아내’를 생각했다고 합니다. 아내와 함께 했던 행복한 일상을 떠올리며 다시 그날로 돌아가는 꿈꾸며 괴로운 현실을 견뎌냈다고 합니다.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던 것이죠.

정혜신 박사는 <사람 vs 사람>(2005)이라는 책에서 말합니다.

“빅터 프랭클은 끌려간 사람의 95%가 도착 30분 내에 가스실에서 처형되었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사람 중 하나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공포, 극심한 기아와 강제노동에 고문까지 견디면서 그는 자기 자신과 수용소에 끌려온 사람들의 심리변화 과정을 관찰하고 기록하여 전쟁이 끝난 후 그 참상을 세상에 알렸다.

그런데 기록에 의하면 엄청난 행운(?)과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아우슈비츠에서 끝내 살아남은 극소수의 사람들 중 99%는 자기경멸로 인한 정신적 황폐화를 극복하지 못해 결국은 알코올이나 약물중독 혹은 자폐증 등으로 고생하다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그런 점을 감안한다면 빅터 프랭클은 그야말로 ‘초월적 존재’라 불러도 될 만한 사람이다. 초월적 존재란 이럴 때 쓰는 말이다. 빅터 프랭클, 김근태 같은 사람이 바로 초월적 존재인 것이다. 그런 이유로, 나이나 성별을 따지지 않고 말한다면 나는 김근태가 너무나 고맙다. 그 지옥의 고통을 겪었으면서도 완전히 무너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옥의 고통 속에서도 완전히 무너지지 않은 사람들. 빅터 프랭클과 김근태.


정혜신 박사는 김근태 고문에 대한 기억도 꺼내놓습니다.

“김근태는 지난 96년 15대 총선을 통해 제도권 정치에 진입했는데, 그는 이 선거를 회상하며 개인적으로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고 말한다. 국회의원 배지를 달았다고 그런 호들갑을 떤다면 애초에 김근태가 아니다. 김근태는 재야에 있던 30여 년간 언제나 익명이나 가명을 쓰면서 자신의 이름으로 살아오지 못하다가 15대 총선 때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공식적으로 내걸고 사람들 앞에 나섰다. 그는 거절되거나 단절되지 않고 사람들과 자유롭게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무척 신기했다고 회고한다. 그동안 왜곡되고 편견에 갇혔던 자신의 진짜배기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가 생겨서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만나 나를 소개하는 일 따위는 너무나 당연한 일상사라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감흥을 주는 일이 아닌데도, 김근태는 그 일이 그렇게 고맙고 좋을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김근태는 그런 삶을 살아온 사람이다.”

 


그런 삶을 살아온 김근태, 빅터 프랭클 같은 사람들의 삶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그 사람들에게 진 빚이 커서이기도 하겠지만
다시는 같은 악몽과 절망을 반복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겠죠.

그러나 그게 끝일까요.
같은 악몽과 절망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김근태를 기억하는 것만큼 김근태를 상처입힌 사람들처럼 되지 않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요.

저는 가끔 그런 상상을 합니다.
내가 만약 일제강점기에 태어났다면, 내가 만약 처절한 독재 시대에 태어났다면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김근태처럼, 독립운동가들처럼 살 수 있었을까.

고개를 가로젓습니다.
그리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일제 시대 독립운동가들을 밀고했던 사람들처럼은,
일제에 적극 부응했던 사람들처럼만은 살지 않을 수 있기를.
엄혹했던 독재 아래에서 자유와 희망을 말했던 사람들에게
총과 칼을 겨눴던 사람들처럼만은 살지 않을 수 있기를.


김근태 상임고문이 타계하자 그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악연’이었던 ‘고문기술자’ 이근안 전 경감에 대한 기사도 많이 나왔습니다. 김 상임고문은 1985년 9월 4일 민주화청년연합을 결성했다는 혐의로 안기부(현 국정원)의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 이 전 경감에게 20여일간 고문을 당했습니다.

전기고문 8차례와 물고문 2차례.
김 상임고문은 고문을 받은 뒤 후유증에 시달렸고 2007년에는 파킨슨병을 진단받았지요.
 
이근안 전 경감은 지난해 한 시사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시대 상황에선 고문이 애국이었다”고 말하기도 했다죠. “애국은 남에게 미룰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지금 당장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나는 똑같이 일할 것이다”, “나는 고문 기술자가 아니고 굳이 기술자라는 호칭을 붙여야 한다면 ‘심문 기술자’가 맞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심문도 하나의 예술이다” 등등.

저는 그 기사를 읽고 정말 아득했습니다.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애국이었을까요.

 

‘악의 평범성’으로 유명한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생각하는 일은 (…) 정치적 자유가 있는 곳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며, 그렇게들 한다. 그러나 저명한 학자들이 보통 말하는 것과는 다르게, 참으로 불행히도 생각하도록 하는 힘은 인간의 다른 능력에 비해 가장 약하다. 폭정 아래에서는, 생각하는 일보다 (생각하지 않고) 행동하는 일이 훨씬 쉽다.”

 

아렌트는 1961년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지휘했던 아돌프 아이히만 재판에 참관합니다.
재판을 보고 그녀는 1963년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보고서를 내놓죠.

그녀는 아이히만이 “우리 주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중년 남성”이라고 평했습니다.
재판 과정에서 아이히만은 “나는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고만 말합니다.
또 명령은 지키는 것이 도리라고 말하죠.

자신의 일이 수백만의 죄 없는 사람들을 살육하는 일이었는데도 아이히만은 자신의 일이 사람을 죽인 것이라는 것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합니다. 시키는대로 했으니 어쩔 수 없다는 것이었죠.
아렌트는 아이히만을 보며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생각해냅니다.

악은 언제나 우리 안에 있다는 것.
“나는 명령받은 대로 했을 뿐”이라는 핑계로 ‘생각’을 그만둔다면
평범한 누구나 악을 저지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렌트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언제나 ‘생각’해야 한다는 것 아니었을까요.
우리 안에 있는 악마를 마주하지 않도록 ‘생각’하는 그것뿐.
악을 마주쳤다 할지라도 그 악을 멈출 수 있게 하는 것은 ‘자기성찰’뿐.

가끔 살아가는 것이 ‘역할 놀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합니다.
각자 맡은 역할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갈등도 일으키고 조화도 만들어내겠죠.
좋은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요.
저는 막연히 ‘좋은 역할’을 맡아 ‘선한 역할행동’을 해내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최대한 좋은 역할을 맡는 것.
그것이 끝이 아니라 그 역할 안에서 최대한의 선한 행동을 하는 것.
내가 맡은 역할이 다른 사람을 상처 입히는 것이라면,
그것도 그 사람의 생명과 안위를 위험하게 만드는 것이라면. 그 역할을 포기하는 게 맞겠죠.

아이히만은, 이근안은 ‘생각’을 멈추고
자기의 역할이 어떤 의미인지, 스스로 선택한 역할 행동이 어떤 결과를 내놓았는지 눈을 감았습니다.
스스로 생각하기를 포기한 사람들이죠.

 


이근안을 찾아내서 그를 속죄하게 만드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어떤 타의로 용서를 구하게 만드는 것이 ‘반성’이 될 수 있을까요.

1999년 11월 언론 기고문을 통해 김근태 상임고문은 말했습니다.

(이근안 전 경감 같은) 고문자들은 독재구조의 악순환에 가담한 가해자면서 동시에 인간성이 파괴된 피해자다.

 


또 우리가 분노해야 할 대상이 이근안 뿐일까요.
당시 이근안에 고문을 지시한 사람들, 그 위 또 그 위 결제권자들, 책임자들...
손에 피 하나 묻히지 않고 사람을 죽여도 상관 없다고 뒷짐지고 있었던 ‘윗분들’
독재 구조를 만들어냈던 사람들. 그 악순환을 묵인했던 수많은 사람들.


기억해야 합니다. 그 수많은 사람들을.

그리고 우리 모두 ‘이근안’이 되지 않을 수 있도록 노력하며 사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요.
다른 사람에게 총을 겨누지 않을 수 있도록.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하지 않을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