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에는 스리랑카에서 제일(?) 유명한 시기리야 궁전에 갔습니다.
시기리야는 사자 바위라는 뜻인데요.
사자의 모습을 한 절벽 위에 궁전을 세웠다고 합니다.
200m 화강암반 정상에 누가 궁전을 지었을까요.
5세기 다투세나 왕의 장남 카샤파는
동생 목갈라나에게 왕위가 돌아갈 것을 우려해 아버지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했숩니다.
평민 출신 어머니를 둔 자신과 달리 동생은 왕족 출신 어머니를 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는데요.
동생의 보복이 두려웠던 카샤파는 바위산 위에 궁전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11년 후 인도에서 군대를 이끌고 온 이복동생과의 싸움에서 패배하고 자살하죠.
동생이 오는지 내려다보며 늘 불안해했던 왕은
동생의 침략을 막기 위해 입구를 하나만 만들었다고 합니다.
정상까지 계단은 1200여개입니다.
먼저 만난 연꽃.
저 멀리 보이는 바위가 '시기리야 궁전'입니다.
이렇게 좁은 계단을 올라가야 하는데요.
올라가니 이렇게 탁 트인 전경이 보입니다.
그리고 벽화가 나타났습다.
500명이 넘는 여인들이 그려져 있었다고 전하지만 지금은 훼손되어 18명밖에 남지 않았다고 하네요.
1875년 우연히 바위산을 망원경으로 살펴본 영국인에 의해 발견됐습니다.
1500여년 전 그림인데도 생생하죠?
바위벽에 바로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니라 그림판을 만들었기 때문이라는데요.
바위 표면에 점토를 바르고 그위에 석회와 모래를 섞어 다시 바릅니다.
그리고 그 위를 다시 꿀을 섞은 석회로 덮었습니다. 이렇게 그림판을 완성시켰다고 하네요.
이렇게 훼손된 모습이 많이 보였어요.
벽화 밑에는 ‘거울벽’이 있습니다.
왕이 궁전을 떠난 후 스님들이 이곳을 사원으로 사용했는데요.
5~10세기쯤 일반인들이 순례하러 많이 왔다고 해요.
그들이 적어놓은 낙서가 아직까지도 남아 있습니다.(사진에서는 잘 안보이네요;;)
남아 있는 글씨를 찾아보는 것도 재미있었습니다.
1600개가 넘는 낙서에서 1600명 이상의 순례자가 다녀갔음을 알 수 있는데요.
낙서는 안 보이네요...;; (왼쪽 벽 부분이 겨울벽이예요)
거울벽을 지나면 나선형의 철제 계단이 쭉 이어지는데요.
한 사람만 간신히 지나갈 수 있는 계단을 계속 올라가야만 정상이 나옵니다.
정상에 오르면 1만5800㎡(4800평) 공간에 궁전 터, 수영장 터가 있습니다.
터라는 게 분명하게 보이죠?
정상까지 물을 끌어온 기법(?)이 아직까지도 미스터리라고 하네요.
곳곳에 수로가 보였습니다.
정상에는 또 카샤파 왕이 무희들의 공연을 감상했다는 돌의자가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동생을 피해 도망친 왕이
수많은 노동력을 동원해 궁전을 짓고 무희들의 공연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아이러니하게 느껴졌습니다.
정상에서 내려와 다시 찍은 사자 발 사진.
원래 두 발 가운데 위에 사자 얼굴이 있었는데 망가졌다고 하네요.
물이 산 아래에서 이곳까지 공급됐다고 하는데 아직도 그 방법의 비밀을 풀지 못했다고 합니다.
곳곳에 남아 있는 수로만 그 흔적을 보여줍니다.
2000년 전 그들은 어떻게 바위 정상까지 벽돌을 옮겨 하나하나 쌓았을까요?
세계 8대 불가사의로 불리는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시기리야 궁전은 1992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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