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사 모음/누런돼지 관리자

부패·전시행정 많았지만 ‘시민주권 확대’에 기여



임아영 기자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6302137225&code=950100
ㆍ지방자치 20년·민선5기 1년
 
1991년 부활된 지방의회가 20년을 맞았다. 유권자들은 지난해 6·2 지방선거를 통해 8번째 지방의원과 5번째 자치단체장을 뽑았지만 한국의 지방자치는 여전히 낮은 평가를 받고 있다. 보수 진영 일부에선 지방자치 무용론까지 유포시키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지방자치는 지난 20년 동안 끊임없이 자기 변신을 거듭해 왔다. 주민들은 마을만들기·축제 등을 통해 정주 환경을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자치단체가 공동정부·주민참여예산제 등으로 주민들과 함께하는 행정도 확산 중이다. 지방의회도 문턱을 낮추고 주민들에게 개방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담배 자동판매기 설치금지 조례를 비롯해 일부 조례는 법률 제·개정의 토대가 됐다. 이젠 전국적으로 일상화된 친환경무상급식·마을만들기 등도 지방에서 시작됐다.
 
특히 지난해 지방선거는 지방자치 혁신의 새로운 전기로 평가 받고 있다. 실제 민선3·4기에는 수도권 자치단체 69곳 중 10곳만 ‘주민참여예산안 조례’를 만들었지만 민선5기 들어서는 불과 1년 만에 14곳에서 조례를 제정했다. 조례 내용도 훨씬 충실해졌다. 전국적으로도 민선3·4기 동안 ‘주민참여 조례’를 제정한 자치단체는 16곳에 불과했지만 민선5기 1년 만에 8곳이 새로 조례를 만들었다.


■ 부천 사례 - 담배자판기
 
일본 전역에서는 어디서든 담배 자판기를 쉽게 찾을 수 있지만 우리나라 대로나 골목길에는 담배 자판기가 없다. 이유는 경기 부천시 주민들이 91년 시의회를 통해 자판기 설치를 금지하도록 하는 조례를 제정하고 법까지 바꿨기 때문이다.
 
91년 7월, 부천YMCA 산하 청소년상담실 자원상담자 모임인 ‘디딤돌 어머니 모임’은 학교와 통학로 근처의 유해시설을 조사했다. 남녀 고등학생 581명 중 51%인 289명은 “흡연을 경험했다”고 응답했다. 어머니모임 회원들은 아무나 쉽게 담배를 구할 수 있는 자판기가 퍼져 나가고 있기 때문이라며 해결책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마침 같은해 8월, 등대생협 조합원들이 “청소년들이 담배 자판기를 통해 담배를 구입하고 있다”며 문제를 제기했다. 생협 조합원들이 11월에 42개 학교 주변에 설치된 담배 자판기 이용 실태를 조사한 결과 이용자의 24%가량이 청소년이라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이들은 실태조사를 바탕으로 담배 자판기 설치 금지 조례제정운동을 시작했다. 부천시의회 의원들은 처음에는 주민들의 방문조차 무시했다. 조례 제정이 지방자치법 제15조(현재 제22조)가 규정한 ‘법령의 범위 내에서’라는 조항에 어긋나기 때문에 부천에서만 담배 자판기 설치 금지 조례를 제정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주민들은 ‘청소년 보호법’을 근거로 시의원들이 주민들에게 조례제정권한을 위임해달라고 요청했다. 시의원들에게 엽서 보내기, 방문하기 등으로 압력을 행사하면서 주민들에게는 서명운동·가두 캠페인·언론 홍보 등을 통해 이 문제를 홍보했다.
 
부천시의회는 결국 92년 7월 ‘부천시 담배자동판매기설치금지조례’를 제정했다. 주민들이 주민발의제도가 도입(2000년)되기 이전에 문제를 제기하고 직접 행동에 나서 조례를 제정한 최초의 사례다.
 
그러나 조례제정 직후인 11월에는 담배 소상인 11명이 헌법재판소에 조례 위헌 소송을 제기했다. 주민들은 이에 지지 않고 동별로 자진철거운동을 벌였다. 결국 49개의 담배 자판기 업주가 철거에 동의했다. 이 운동의 힘은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93년에는 전국 12곳을 중심으로 담배자판기추방 전국시민연대가 결성된 것이다. 헌재도 95년 4월 조례가 헌법에 일치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부천시의 조례가 성공적으로 제정된 이후에 전국의 모든 담배 자판기에는 성인 인증을 거친 후에만 구입이 가능해졌다. 김기현 부천 YMCA 사무총장은 “20년이 지났어도 시민들이 그만큼 광범위하게 참여한 사례는 보지 못했다”며 “주민들이 동단위로 조직화되어 적극적으로 움직인 독특한 사례”라고 말했다. 하승수 투명사회를위한정보공개센터 소장은 “담배 자판기 사례는 주민들이 지방의회와 조례를 통해 실생활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보여준 경우”라고 말했다.


 ■ 제주 사례 - 친환경급식
 
제주는 친환경급식의 교과서로 불린다. 2008·2010년에는 친환경무상급식대회가 제주에서 열릴 정도였다. 이 같은 성과는 2003년 제주 시내 아라중학교에서부터 시작됐다.
 
진희종씨(52)는 이 학교의 운영위원이었다. 그는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운영위원 활동을 고민하다 “학교와 친환경농업이 좋은 관계를 맺으면 아이들과 친환경 농가 모두 좋지 않겠느냐”고 주변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교사·학부모 모두 “현실성이 있느냐”며 회의적 반응을 보이자 대안을 마련했다. 그렇게 ‘초록빛농장’이 탄생했다. 이후 학생·교사·주민이 함께 농사를 지어 친환경우리농산물과 학교급식을 연계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줬다. 이 힘을 바탕으로 제주도 내 55개 시민사회단체가 ‘친환경우리농산물학교급식제주연대’로 뭉쳤다. 제주시장과의 면담 이후 같은해 9월 ‘제주시 친환경급식추진 실무협의회’가 탄생했다. 주민 발의로 조례를 만들기 위한 서명에 2만여명이 참여했다. 2004년 5월 도의회 의결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탄탄대로만은 아니었다. 당시 행정자치부는 ‘우리농산물’이라는 말이 들어가면 조례를 만들 경우 WTO 규정에 위배된다며 재의를 요구했다. 도의회는 행자부의 재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만장일치로 원안을 재의결했다. 행자부는 이 조례를 대법원에 제소하겠다고 했지만 자체 철회했다. 김남훈 제주도 친환경급식연대 사무처장은 “제주도는 ‘우리 농산물’ 명칭 그대로 지역에서 친환경급식을 하고 있다는 점, 시민운동·주민운동만으로 전개되는 게 아니라 관과 상시적 협의가 가능한 구조, 그만큼 지역 주민들이 도내에서 사회적 합의를 이뤄왔다는 점에서 중요하다”고 말했다.
 
진희종씨는 8년이 지난 현재 “제주도 급식 문제가 우리 사회의 아이들 건강 문제, 먹을거리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된 것 같아 의의와 보람으로 생각하고 있다”며 “좋은 세상을 만드는 데에는 각자 자기 주변에서 문제의식을 가지고 스스로 해결해보려는 노력을 하면 의미있는 변화가 일어나고 그 변화가 일반화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말했다.